구원의 믿음

[스크랩] 구원을 내가 이룰 수 있습니까?

끝까지주를위해 2011. 8. 21. 23:36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글/김병덕 목사

 
빌립보서2:12-1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구원을 내가 이룰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구원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본문 말씀과 같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뿐 아니라 성경에는 내가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 같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히 본문 말씀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구원을 내가 이룰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무엇 하러 오셨습니까? 내가 구원을 이룰 수 있는데 굳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내가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데 오셔서 굳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고 또 나는 나대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중 구원론이 됩니다. 내가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어떤 조건이 있다면 아니 어떤 행위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으며 굳이 그의 은혜를 사모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내가 꾸준히 무엇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입니다 그 지식을 기초에 두고 성경해석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 하다가 결국 자기 함정에 빠져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救援]의 사전적인 뜻입니다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쉽게 설명을 드리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건져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힘이 다 빠져서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을 누군가 와서 그를 끌어내어 그 생명을 살려 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와서 끌어 낼 때 물에 빠져 있는 사람이 끌어내는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끌어내는 사람의 능력으로만 생명이 살 수 있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힘이 남아 있는데 구원해 주는 사람이 와서 협력해서 물에서 빠져 나오는 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구원은 온전히 끌어내는 이의 능력만으로 행하는 것이라서 은혜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끌어 내 주는 이가 손을 내 밀고 내가 그것을 붙잡아서 물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끌어내는 이의 강한 손이 건져 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습니다. 죽어가는 나를 내 스스로가 살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드시 죽는 나를 살려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에 내 어떤 노력이 포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져야 은혜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물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2:8절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선물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내가 선물을 주었는데 그가 그 선물의 값의 10분의 일이라도 지불을 한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만약 그 선물에 어떠한 대가가 있으면 그것은 선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선물은 그것을 준 사람으로부터 거저 받았을 때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물을 주었는데 어떤 대가가 없기 때문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정의를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선물을 선물로 받으려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는 선물도 그 주는 이에게 이것 얼마냐 내가 이 선물의 값 얼마를 주겠다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마 선물을 주는 사람은 심히 불쾌해서 다시는 그 사람에게 선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려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그런데 만물을 지으시고 창조하시고 만물이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오는데 그런 하나님께서 나에게 선물을 주셨는데 그 값의 얼마를 갚으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선물을 선물로 받으려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구원이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선물로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선물을 내가 이루려고 하는 행위는 선물을 거절하겠다는 의사 표시와 같습니다. 이런 사상이 기초가 되어 있는 가운데 빌립보서의 본문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선물로 먼저 받아 놓고 나서 빌립보서를 보아야 성경말씀에 대해서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제 이 말씀이 조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룰 수 있는 구원이라면 두렵고 떨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잘 해서 이루면 되지 무엇이 두렵고 떨립니까?  내 편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두려워하고 떨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죄를 짓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짓지 않고 율법을 모두 다 지킬 수 있다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할 때 두려워합니까? 아니면 죄를 질 때 두려워합니까? 선을 행할 때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물이 나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선물을 받는데 있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구원을 내가 이루는 것 같으면 당당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내가 무엇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나는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내 것 같으면 두려워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남의 것을 더구나 선물로 영원한 생명을 받는데 있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지 내가 무엇을 행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말씀이 걸림이 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에 거의 모든 사람이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복종을 하는데 있어 무엇을 어떻게 복종할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본문 말씀을 보면서 스스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복종하면 행위를 생각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 행위를 자기 자신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두려워하게 됩니다. 남은 나를 잘 모를지라도 내 마음에 죄악과 탐심과 정욕을 내 스스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게 됩니다.


율법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복종하고 있습니까? 온 율법을 지키다 하나에 거치면 모두를 범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온 율법을 항상 다 지키고 있다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어도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매일 사는 순간순간 마다 율법을 범하는 사람이 이 말씀을 보고 율법에 복종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두려운 것입니다.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면 뻔히 율법에 복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더욱 더 두려워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 더욱 율법에 매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함정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율법으로는 복종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그렇게 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욥이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내게서 죄를 찾아보라고 그 친구들과 변론을 하면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보겠다고 자신 있게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의 죄를 지적해 주시니까 스스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를 했습니다.


사람은 죄를 찾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구원을 이루려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율법에 복종을 하면서 그 율법을 지키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역시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게 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에 복종하라고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폐하여 졌다고 하는 그것에 다시 복종하라고 본문 말씀을 기록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볼 필요도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1:8절을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성도는 복음에 복종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폐해 버린 율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복음에 복종을 하면서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에 어떻게 복종을 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육적인 사람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율법에 복종을 하고 있고 영적인 성도는 복음에 복종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복종하라는 말씀은 항상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또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데 있어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내 생각에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본문 말씀을 보면서 거의 율법적인 사상에 사로잡혀서 해석을 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노아를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에게 약속을 하시고 야곱을 구속하셔서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들이 어떤 행위를 잘 해서 자기들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람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복음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복종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믿으려 하기 보다는 행위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신앙인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용입니까? 형식입니까? 성경 전체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다가가게 하는 것이 바로 형식이요 율법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내용에 충실한 자는 내용을 더 깊이 알고자 사모를 하고 형식에 충실한 자는 더 좋은 형식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이 둘을 다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둘을 다 갖출 수 있다면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내용을 따라가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복음에 복종을 하면서 자기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경 전체의 내용을 알고자 지혜를 늘 구합니다. 그러나 형식에 사로잡히면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한 형식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였다면 이 시대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 같이 음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음녀는 두 남편을 함께 섬기는 자입니다. 율법의 남편과 복음의 남편을 함께 섬깁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될수록 교회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하나는 바로 신비주의고 다른 하나는 음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에서 변화가 된 성화주의입니다.. 복음도 믿고 그리고 율법도 잘 지키는 사람의 눈에 보기에 최상의 모습으로 보여 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제 잡는 격입니다. 예수도 잘 믿고 또 성화가 되어 율법도 잘 지키고 하는 것은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 마음을 사단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그런 자들을 지도자로 세운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17:7절을 보면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사도 요한이 놀란 것입니다.

왜 마지막 교회의 모습을 보고 놀랐겠습니까? 사도 요한이 보기에는 분명히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게 보였는데 그 교회가 바로 음녀에게 미혹이 되어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놀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완전하게 있어 구원을 받은 사도 바울도 마지막 교회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사단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이 놀라운 것을 자기가 멸망에 빠질 때에 알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보기에 가장 완전한 교회가 바로 음녀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교회가 큰 음녀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큰 음녀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내가 올 때에 믿음이 있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을 그대로 환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형식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 형식이 너무도 좋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케스트라 같은 찬양대와 그리고 성 같은 교회를 지어 놓고 세상에서 이름 있다 하는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 그 예배에 참석을 하고 그 안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너무도 매력적인 모습니다.


제가 큰 교회가 무조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용을 모르고 형식을 따라가려 하는 일부 대형 교회들에 의해서 거의 모든 사람이 영적인 음행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이 음행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음행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은 음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복음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자기가 무엇에 복종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음행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게 하시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에 복종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감동을 해 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고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았다 해도 복음을 내 지혜로는 깨닫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알게 하셔야 믿습니다. 내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자체가 음행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그 놀라우신 경륜에 의해 내가 구속함을 입어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구원을 자기가 이루려 하다가 결국 음행의 그물에 걸려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성도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위하여 나에게 복음을 믿게 하시고 그 복음을 내가 믿음으로 하늘에 소원을 두고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을 사모하는 그 자체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곳은 돈으로도 명예로도 그리고 내 의로움으로도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아니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팔지 않으십니다. 그런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씀을 합니다.

천국은 내 노력으로는 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은혜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두 남편을 섬기면서 음행을 하는 자들입니다.

천국의 가치를 너무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고 노력을 합니다. 오히려 그 노력으로 인하여 그물에 빠져 천국에 갈 수 없게 되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는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복음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아주 잘 알고 있고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지금도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면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복종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자꾸 율법의 모양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복음에 복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율법에 빠져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게 만들 것입니다.


주인에게 복종을 하는 종은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복종을 하지 않는 종은 자꾸 다른 것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을 무시하고 때로는 멸시를 하면서 종이 오히려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내 율법의 의가 나타나기 시작을 하면 내 안에 예수가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빌립보서 2:12 <킹제임스 흠정역>

관련자료보기=☞'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무슨 의미

 

구원은 내가 이룰 수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에 복종을 하여 내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에 복종하게 하시는 능력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진리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복음에 복종하여 자기 구원을 이루는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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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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