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회개케 할 수는 없다’는 것은?
글/이상봉 목사
본문-히브리서 6장1-8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6:1-8)
이 히브리서 6:1-8의 말씀은 히브리서의 세 번째 경고이다. 우리는 먼저 이 경고가 세상 불신자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란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신자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시는가? 신자들도 타락하여 저주와 불사름을 당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그럴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하여 결국 망하는 자라면 하나님이 택하신 참 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그럴 수 있다’(타락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참 신자라도 많은 경우에 그 연약함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믿음이 약해져서) 의심에 빠지거나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서) 진리에서 떠나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신자들만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거짓 신자들의 타락과 방황은 실패라고 말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생명 없는 자들이 생명 없는 모양으로 행하는 것은 정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참 신자들도 때로 실패한다는 것이다. 참 신자라도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순간 순간 자기를 부인하고(십자가를 의지하고) 범사에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적어도 그 순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만일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모두 명목만의 신자들, 즉 사실상의 불신자들이나 배교자들 뿐이었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경고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교회의 진보 없는 다수가 참 신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책망도 하고 경고도 한 것이다. 우리는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논리나 당위성에 끼워 맞춰서 (예를 들면 한 번 부름 받은 사람은 절대로 타락-후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억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할 때 참 신자도 분명히 종종 (사탄에게 속거나 믿음이 약해져서) 의심에 빠지며 진리에서 벗어나 그릇된 길로 간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타락이다. 그러므로 신자도 타락하는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도 그랬고 뛰어난 영적 인물들도 일시적으로 그런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지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만일 영구적으로 그런 상태에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신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자도 잠시 타락하여 잘못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람에게 실패의 가능성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혜사(은혜를 보존하시는 자)로 보내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령님은 한 번 부름 받은 신자들을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지켜 보호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헤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가 때로 타락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타락(후퇴) 곧 의심에 빠지거나 세상 정욕이나 허무한 상태에 빠져서 헤매는 것이 정상(좋은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그 자녀들을 권고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히브리서의 이 세 번째 경고는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신자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진리의 말씀은 거짓 신자들을 심판하여 참 신자들로부터 갈라낸다. 앞에서 말한 대로 논리적(당위성)으로 말하자면 신자에게 있어서 타락(후퇴, 퇴보)이란 불가능하다. 생명이 있는 자가 생명 없는 자처럼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세계를 맛본 사람이 도로 세상 죄인처럼 살거나 율법을 붙잡고 은혜를 거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 현실이 아니라 허구적 현실이다. 즉 그 사람은 자기 생명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아 제 정신이 아닌 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의 타락은 정신을 잃고 헤매는 것이지 결코 실제일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정말로 타락하여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개처럼 행동하는 것이며 남자가 여자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욕을 보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한 것처럼 신자가 타락하여 옛날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혹시 타락하여 헤매게 되더라도 ‘내가 말씀이 없어서 일시적으로 사탄에게 속았구나’ 생각하고 속히 제자리로 돌아와야지 고집스럽게 오래 타락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신자의 타락은 망상과 거짓일 뿐이다. 꿈은 깨면 되고 망상은 깨치면 된다. 히브리서 기자가 의도한 것은 신자들에게 자신들의 실제(정상적인 상태)를 가르쳐 일깨움으로써 그들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는 이런 경고를 듣고도 끝까지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진리를 듣고도 믿음으로 받지 않고 회복도 전진도 없는 자들, 이들은 처음부터 신자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곧 경고의 말씀은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갈라낸다. 산 나무에 물을 주면 더욱 살고 싱싱하게 되지만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 더 빨리 썩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참 신자에게는 격려와 회복과 전진을 가져다 주지만, 거짓 신자, 곧 말씀을 듣고도 끝까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심판을 가져다 준다.
6:8에서 말한 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는 경고는 이런 거짓 신자들에게는 회복과 전진을 위한 권면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받게 될 심판과 저주를 경고한 말씀이 된다.
히6:1-8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녀들은 성장을 멈추고 영구히 어린아이로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마치 태어나지도 않은 자처럼 도로 뱃속으로 들어가려는(즉 세상이나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식의 퇴행(退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제나 현재 자기 상태를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말고 과연 내가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지, 진리를 따라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항상 돌아보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문제가 있는 것이 발견되면 즉시 참회(慙悔)하고 회복하여 온전케 되어야 한다.
만일 신자가 너무 오랫동안 타락에 머물거나 성장을 멈춘 채 있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비록 그가 신자라 할지라도 땅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축복을 향유하지 못하고 크게 곤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6:4-8에 언급된 사람들, 즉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타락자는 어떤 사람인가? 6:4,5절을 보면 이 타락자들은 다음 네 가지 경험을 가진 자들이다. ① 한 번 진리의 빛으로 비췸을 받은 바 있다. ②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③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바 있다. ④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 문제는 이런 경험을 하고서도 타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들의 결말은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라고 했으니 그것 또한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일시적으로 신자가 타락할 수 있으며 그것이 길어질 경우 하나님은 신자의 회복과 유익을 위해 징계를 내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도 잘못하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이다. 죽은 후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다. 설사 나중에 영생을 누릴지라도 지금은 안식과 평강이 없는 죄인의 길에서 헤맨다면 그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이것은 결국 이 땅에서의 상황만 놓고 보면 영생을 얻은 자라도 잘못하면 영생을 잃을 수도 있고,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잘못하면 그 구원을 놓칠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히브리서의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히6:1-8의 경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히브리서의 주제가 무엇이며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인의 전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다. 신자는 반드시 계속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야지 중간에 주저앉거나 뒤로 물러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옛 것에 매이거나 육적 신자의 자리에 적당히 머물지 말고 계속 믿음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그의 서신 전편에 걸쳐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런 히브리서 안에서도 전진에 대해 가장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5:11-6:8 말씀이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5:11,12)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얻은 날부터 계속 자라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어린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그를 통해 몸(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이 드러나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자신도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면할 수 없다. 생명의 성장 없이 계속 초보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명목만 신자이지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못 누리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진리)를 누림에 있어서 미성숙한 초보의 상태를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진리의 기초를 계속 다시 닦고 앉아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 세례와 안수에 관한 가르침,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가르침, 영원한 심판에 관한 가르침. 이것들은 모두 신자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거쳐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집의 터와 같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기초이지 집 자체는 아니다. 그러로 신자는 이것을 신앙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심지어 이것마저 놓쳐서 다시 그것들을 붙잡으려고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집의 터는 한 번 닦으면 그것으로 족하며 그 후에는 건물을 지어야 한다. 그러므로 터만 닦아 놓고 거기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신자가 진리의 기초에만 머물거나 그것마저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으러 다시 왔다 갔다 하는 것 즉 범죄와 회개 사이, 불신앙과 신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모두 정상이 아니라 ‘타락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본래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책이 아니라 믿음으로 전진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6:1-8에서 언급되고 있는 타락과 타락자의 결말 역시 구원이냐 버림받음이냐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전진이냐 중단(실패)이냐 하는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부분을 구원 문제와 결부하여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스런 건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사람 자신의 구원과 복락(福樂)에만 온통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구원이 마치 신앙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여 온통 구원 문제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승리와 실패, 전진과 타락, 영접과 버림받음에 관한 말씀만 나오면 무조건 그것을 구원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고 구원받은 사람의 승리의 삶과 믿음의 전진에 대해서도 많이 말하고 있다. 6:1-8 말씀 역시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 신자의 승리 생활을 다루고 있는 말씀이다. 히6:1-8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부분은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다. 첫째, 1-3절 : “터를 다시 닦지 말라”, 둘째, 4-6절 : “타락할 수 없다”, 셋째, 7-8절 : “타락에 머물지 말라”
⑴ 터를 다시 닦지 말라
1-3절 말씀은 도의 초보에 해당하는 여섯 가지 사항 즉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에 관한 교훈, 안수에 관한 교훈,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훈,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등을 다시 닦지 말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것들은 집의 터가 되는 기본 진리들로서 한 번 닦였으면 더 이상 닦을 수도 없고 닦을 필요가 없다.
왜 진리의 터는 다시 닦을 수 없는가? 첫째, 주님이 그의 사역과 십자가에서의 승리를 통해서 진리의 터(거듭남, 회개)를 확실하게 닦았기 때문이다. 둘째, 다시 닦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구원 역사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이 그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 죽고 그는 그것을 의지하여 다시 거듭나는 식으로 한다면 주님의 처음 십자가의 역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신앙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터가 닦였으면 그 다음에는 집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聖殿)은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중단됨 없이 건축되어져 왔다.(엡2:20-22)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건축이 속히 완성되도록 믿음으로 달려가야 한다.
⑵ 타락할 수 없다
4절에 나오는 “한 번”이라는 말은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이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한 번 “비췸을 얻고 ... 내세의 능력을 맛 본” 사람은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거듭난 자들이다. 이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 버린 자들과 같아서 이미 받은 구원을 없었던 일로 하고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런 사람은 비록 타락하더라도(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서 그릇 행하더라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회개란 뒤로 돌아설 수 없다는 것이다.회개는 참회(눈물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것)가 아니고 현재의 자리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회개는 죄진 것을 토설하는 것만 회개인 것같이 가르쳐서 회개라하면 무조건 앞뒤를 보지도않고 울면 되는 줄안다.진정한 회개는 돌아서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회개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상으로 회개할수 없다는 것이다.(廻 돌회 改 고칠개)
구원받은 사람을 구원받지 않은 불신자처럼 다시 회개케 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새 사람이 옛 사람인 것처럼 사는 것은 정말로 옛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자리를 모르고 헤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서 어떻게 그 사람을 다시 거듭나게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어떤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은 일로서 도저히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일이다.
6장4-6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전에 이미 닦은 터를 다시 닦아서는 안된다는 6장1-3 말씀의 연속이요 부연설명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미성숙한 신자뿐 아니라 믿음에서 떨어져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신자도 한 번 거듭난 사람인 이상 다시 회개케 하여 새롭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신자가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것이다.
거듭한 후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해서 계속 거듭나야 한다면 그의 처음 구원(거듭남)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6:6절에 나오는 회개는 6:1절에서 말하는 회개와 같은 회개이다. 그것은 진리의 『터』로서의 회개, 즉 처음 구원받을 때 주님을 믿고 세상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이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타락(범죄)하더라도 다시 회개함으로써(하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식으로) 터를 다시 닦을 수 없다. 물론 거듭난 사람이라고 회개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6:1,6에서 말하는 회개는 그런 회개, 즉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회개가 아니라 처음의 위치로 돌아가서 다시 새롭게 하는 회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6:1-8 말씀은 만일 어떤 사람이 거듭나고 많은 은혜를 받은 후에 실패하여 타락한 상태에 빠진다면 단순히 자기의 위치를 바로 깨달아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면 되지 처음으로 돌아가 회개를 다시 하는 식으로 터를 반복하여 닦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세례요한의 회개는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 하나님께 돌아오라 라고 외친 것이고, 예수님은 "내게 돌아오라"라는 회개를 외치신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타락한 사람에게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타락한 사람을 변호하고 타락이 아무 일도 아니라고 강변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오히려 記錄者가 강조하는 것은 한 번 구원받은(생명을 얻은)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터(회개廻改)를 다시 닦을 수 없으니 ‘타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자의 타락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기자의 목적이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없다는 것이다. 영생의 자리로 옮겼는데 회개(廻改)를 한다면 죽음의 길로 돌아간다는 말이냐?
신자의 타락이 현실적으로 엄연히 일어나고 있지만 원리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번 어른이 된 사람이 다시 아기로 돌아갈 수 없으며 한 번 홍해를 건너 애굽에서 나온 사람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거듭난 사람은 타락할(거듭나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하지 말고, 즉 진리에서 벗어나서 거짓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말고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⑶ 거기에 머물지 말라
1-3절에서는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했고 4-6절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했지만 7,8절에서는 결론으로 “거기에 머물지 말라”고 경계한다. 즉 신자는 (습관적인)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이는 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타락(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계속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실 것이다. 이 징계는 무서운 것으로서 육체의 모든 것이 다 소진될 때까지 계속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길에서 퇴보하거나 전진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신자가 잠시 타락할 수는 있지만 계속 거기에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자가 범죄하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생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신자라도 죄를 범하면 구원을 놓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죄를 범하더라도 예수님이 그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은 다 옳지 않은 생각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이 성장하고 전진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장성한 상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고 계속 타락하여 악에 빠져 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6:8은 그런 자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말이 있게 될 것을 말했다. 첫째, 버림을 당한다. 둘째, 저주함에 가깝다. 셋째, 불사름이 된다.
① 버림을 당한다
고전9:27에서 바울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혹 자신은 실패하여 버림을 당할까 하여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게 했다고 했다. 6:8에서 말하는 “버림을 당하고”라는 말은 고전9:27의 “버림이 될까”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다. 최후의 순간에 주님의 영접을 받기를 진정으로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실패의 가능성이 있으면 그것을 크게 경계한다. ‘버림을 당한다’는 것이 아주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구원은 받되 상이나 특권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는 마치 애굽에서는 나왔으나 믿음이 없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알기 어려운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쨌든 믿음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타락의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버림을 당하는’ 자들은 주님을 끝까지 따라간 이기는 자들이 누리는 생명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② 저주함에 가깝다
이것은 계속 타락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자의 결말은 저주받은 자들, 곧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상태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신자는 타락하여 그 생명대로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최후에 불신자가 받을 저주(영원한 심판)를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삶은 구원받지 못한 자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곤고하고 참담한 상태가 될 것이다. 위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도 없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도 없는 삶이 되어 저주를 받은 것이나 비슷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③ 불사름이 된다
바울은 고전3:12-15에서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말함으로써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했다. 히브리서 기자도 12:29에서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했다. 진리의 말씀을 항상 듣고도 그것에 대해 믿음으로 화합하여 순종치 않고 진리와 거리가 먼 생활을 계속 하는 사람의 결말은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마치 불로 태워질 것들로 가득찬 소각장에서 사는 것과 같다. 물론 타락한 신자의 결말이 전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아 불로 소멸되는 것과 전적으로 같지는 않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삶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생명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순종하여 생명대로 살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허무하고 공허하며 비참한 것이 될 것이다.
히6:1-8 말씀의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1-3은 터를 다시 닦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6:4-6은 타락한 신자는 그의 처음 회개로 돌아가서 다시 새롭게 될 길이 없기 때문에 오직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6:7,8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구원의 자리에서 벗어나 계속 타락한 상태에 머물면 반드시 큰 징계가 따라서 곤고한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약속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본문에서 말한 바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것이 단지 신자가 일시적으로 믿음에서 떨어져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교(背敎)’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배교란 겉으로 보기에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 즉 본문의 서술대로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 아는 바를 전면 부인하고 또 그 같이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역사상 가룟 유다나 마술사 시몬(행8장), 후매네오와 알렉산더(딤전1:20, 딤후3:6-9) 등과 같이 믿고 많은 은혜를 받은 (것처럼 보인) 후 사탄에게 도로 사로잡혀서 주님을 배반하고 세상으로 가 버린 자들이 있었다. 물론 참으로 진리의 빛을 보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라면 타락할(배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닌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마치 신자가 타락할(배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죄나 짐짓 죄를 범하는 소위 고범죄(故犯罪)도 이와 비슷하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주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그것을 귀신들려서 하는 일이라고 하며 주님을 배척한 막3:22-30의 서기관들에 의해 저질러진 바 있다. 이 두 죄, 즉 배교와 성령훼방죄의 공통점은 둘 다 ‘주님을 경험한 사람만이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지한 상태에서 짓는 죄는 그것이 어떤 악한 죄라도 (적어도) 배교나 성령 훼방 또는 히10:26에서 말하는 고범죄(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것)가 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곧 진리의 내용과 능력을 경험하고서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만이 배교나 성령 훼방, 고범죄가 될 수 있다.
만일 6:4-6에서 말하는 사람이 이러한 배교자라면 그런 사람은 당연히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한 번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든 인류의 문제를 단번에 완전히 해결하기에 충분한 은혜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은혜(십자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거나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여 거부하는 자에게 무슨 다른 은혜의 수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자에게 만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두 번 세 번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도 그것으로 부족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거나 복음에다 율법이나 다른 것(인간의 철학이나 사상, 제도, 전통, 노력)을 보태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새롭게 할 길이 없다. 6:4-6에서 말하는 사람이 배교자라고 할 때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러한 것이다. 또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는 6:7,8절 말씀은 이런 배교자들이 당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말한 것이 된다.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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