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지식

[스크랩] 사도신경의 유래에 대하여

끝까지주를위해 2016. 1. 31. 20:07

사도신경의 의미와 유래(由來)에 대하여

 

우리가 예배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은 어디에서 생겨난 건가요?

우리가 왜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워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사도신경의 의미와 유래

최초의 신앙 고백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16:16)라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 제자들은 교회를 세우고 전도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이면서 복음을 전파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 교회가 세계를 향해 흩어져 나가기 시작할 때, 신앙으로 하나가 되고 신앙적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조항을 만든 것이 그 시작입니다.

 

 

신앙 고백을 위해 만든 조항들은 이단(異端)들로부터

순수한 신앙을 방어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내용이 첨가되기도 하면서 그 모양을 다듬어 나가다가, 서기 404년에 루피누스가 주석을 펴내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신앙고백문이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무려 40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가 압축된 신앙 고백의 결정판입니다.

 

 

사도신경을 다함께 암송하는 이유에 대한 변()

1)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6,000년 역사를 모두 합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나타낸 신앙의 요약문입니다.

 

 

2) 교회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없다면 그 교회도 올바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이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교회를 교묘하게 파괴시키려는 이단의 침투에서 성도들을 지켜줍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표준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단체나 개인은 잘못된 이단입니다.

 

 

3) 사도신경은 공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고백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자기 중심적 신앙 표현이나 주장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공식적이고 성경적인 신앙고백입니다.

 

 

=======================================================================

이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해봅니다.

 

 

--------------------------------------------------------------

사도신경은 성경적으로 옳은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도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외우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저도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救主)로 영접하고서도

얼마동안은 당연한 것처럼 느끼고 여겨서

본질도 모르고 내용의 그럴듯한 의미로 오랫동안 사도신경을 외웠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서 구원을 얻고

성경을 깊이 공부하고 나서부터는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았으므로 외우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성경 어디에도 사도들이 신경이나, 신조를 만들어서 외우게 하였다는 구절을 살펴볼 수 없습니다.

이 사도신경은 카톨릭이 형성될 무렵인

니케아 공의회(325AD),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파와 논쟁하던 당시 (3세기 후반)에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한 구절 한 구절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처음부터 이 사도신경은 대충대충 교리에서 출발함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모든 만들어진 것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지음을 받지 않고는 생겨나지 않았습니다(1:2)

 

 

또한 골로새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성서 공회 개역개정)

 

 

다시 히브리서 1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개역 개정)

 

 

에베소서 3

9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의 경륜이 어떠함을 모든 자들에게 비추도록함은, ( 전수사본 번역)

 

 

(네슬알란드 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를 빠뜨렸으나 압도적 절대다수의 사본들은 이 대목을 포함하고 있음)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창조사역에서 성자께서 주도적 역할을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예수께서는 아버지 품속에서 몇 천년동안 잠만 자다가 때가 되어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로 들리게 합니다.

그분은 구약시대에 무수히 나타나셔서 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분의 날을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았고 기뻐했으며 (8:56-8) 모쉐는 그리스도의 수치를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11:26)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니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외아들은 아들 둘이 있다가 하나가 죽으면 남은 아들은 외아들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처음부터 오직 한 분 아들만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안에서 독생하셨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외아들과 독생자는 분명 다릅니다.

 

 

그분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태어났습니다.(마태 1:20) 여기에 쓰인 게나오 동사는 태어나다는 뜻입니다.

마태 120절의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비드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암 맞이하기를 두려워 말라.

그녀안에 있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나져서 계시느니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난자와 하나님의 정자가 결합하여 태어나진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전에도 계셨으며 그를 만난 것을 기억하십니다! 정자는 기억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자는 뇌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인간으로, 완벽한 인격체로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져 마리아안에 심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대리모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정확히 한다면 성령에 의해 태어나사 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저는 마리아가 평생동정녀였다는 주장을 안믿습니다.

마리아는 적어도 52녀 이상을 낳았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예수님이었습니다.

나머지 자녀들은, 야고보, 요세, 시몬, 유다였으며 딸들도 복수인 것으로 보아 둘 이상이었습니다.(13:55)

카톨릭은 이들이 마리아의 다른 자매들에게서 나왔다는 둥, 요셉이 마리아와 재혼했다는 둥, 마리아가 처녀로 살았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필사적입니다!

마리아의 평생동정은 마리아종교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동정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동정녀는 처녀와 다릅니다.

처녀는 결혼이전에 처녀인 것이고 동정녀는 평생동안 처녀로 살기로 서약하고 그렇게 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처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라고 바꾸어야 합니다.

영문의 경우 그냥 버진 마리아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도 평생동안 처녀였음을 주장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일 때 그녀에게서 나오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오셨으며 그 어린양은 대제사장에 의해 잡혀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기본 진리를 모르고 쓴 구절이며 실제 빌라도의 역할에 대해서도 잘못 인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즈음에는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로 바뀌기도 한것으로 압니다만 빌라도 아래가 되었든 위에가 되었든 빌라도가 대제사장 대신 왜 나옵니까?

굳이 써야 한다면, 대제사장과 장로들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 대목의 중대한 하자를 읽어보십니까?

소위 신경이라 함은 교리의 중요부분을 요약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신경 전체를 통해보아도,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그분의 죽으심으로 무엇이 이루어 졌는가를 안 가르쳐 줍니다!

일종의 눈가림 작전이며, 수십억의 사람들을 눈멀게 하는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사실과 진리를 믿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구원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가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 언급되어져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사도신경을 어렸을 적부터 외웠지만,

저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사해졌다는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서는 피흘림이 없은 즉 죄사함이 없습니다(9:22)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 대신 피흘리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가 못박혔어야 할 그 십자가에 우리 대신 나타나셔서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입니다(2:20)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대신 우리 안에 사시며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왕이시며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셨으며,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4:25)

 

 

사도신경은 바로 이런 중요진리를 못깨닫고 다른데로 관심을 돌리게 하려고

사탄이 배후 조종하여 만들어낸 것처럼 보입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만일 이 대목에서 장사한지 3일 만이라는 말이

금요일에 죽으셨다가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앞 부분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이나 많은 개신교인들은

예수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이틀밤을 무덤에서 지낸 다음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땅의 심장에(땅속에) 세 밤과 세 낮 동안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40)

이렇게 금요일에 죽으셨다가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경우 예수님의 예언은 틀린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금요일에 죽으셨다는 주장은

다음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을 잘못 인식한데서 온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 그분의 시체를 내릴 때, 안식일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규 안식일이 아닌 큰 안식일이었습니다(19:31)

이 큰 안식일이란 유월절 안식일을 말하는 것으로

일년중 한번 있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다음날은 정규 안식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리하여 사흘만에가 정확히 세 밤과 세 낮을 지낸다음이라면 앞 대목은 문제가 없겠으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성금요일이라는 개념으로 알고 있다면 잘못입니다.

 

 

다음 대목에서 죽은 자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는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죽은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바 되시고가( 또는 살려지시고) 정확합니다(4:25)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죄값을 갚으셨으며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살아나시고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나 그분이 직접 스스로를 부활케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전적 신뢰하고 순종하셨으므로, 아버지와 성령님께서 일으키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을 간접적으로 예수님은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고 (2:19),

바울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이라고 하였으나(3:10),

대체로 성경은 예수님의 전적인 신뢰와 순종에 대응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께서 그분을 일으키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많으신 긍휼대로 그분을 부활케 하셨습니다(벧전 1:3) 또한 성령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1:4)

 

 

아버지께서 살리셨음을 말하는 대목들의 몇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2:24, 2:32, 3:15, 4:10, 5:10, 10:48, 13:30, 13:37, 17:31 8:11, 10:9 고전 6:14, 15:15, 1:1

그외에 무수히 많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스스로가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성령님으로 역사하시사 그분을 일으키셨으며 예수님은 전적인 순종과 그분께 대한 신뢰를 통해 아버지의 부활케 하심에 호응하셨고 화합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살아나셨다는 주장의 위험을 제거합니다.

그 주장은 바로 예수님이 죽은 상태에서 누구를(스스로를) 부활케 하셨다면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철저히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일으켰다는 주장은 영지주의자들이나

그밖의 이단들이 예수님이 죽은 것은 육체 뿐이었지

영은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육 모든 것이 철저히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한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스스로를 부활케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살려지신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대체로 사도신경이

예수님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바는 창세때부터

아버지 품속에서 계속 잠만자다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난 아이처럼 보이며,

분이 창조주이셨고 세계를 운행시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쉬며 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기도 하십니다 (8:34, 딤전2:15, 12:24)

그분은 우리와 교제하십니다(고전 1:9)

그분은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아버지 앞에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여 주십니다(요일 2:1)

그분은 일곱 금촛대들 사이로 다니시며

교회들의 머리로서 교회들을 다스리십니다(1:12-20, 2, 3)

그분은 온 우주의 운행을 맡고 계십니다(1:3)

 

 

그분은 앉아계시다가 일어서실 때도 있었습니다(7:55)

그분은 바울에게 직접 말씀하실 때도 있었으며(9:4-16)

성만찬을 직접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습니다(고전 11:23)

바울은 다른 사도들에게 성만찬에 대해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 믿는 자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를 준비중에 계십니다(14:2-3)

 

 

이 대목을 반복하여 암송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사역을 다 알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에서도 신경을 암송했다는 말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앉아있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어거스틴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시고 다스리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칼빈 또한 천년왕국을 믿지 않았습니다.

즉 전천년설 대신 무천년설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천년동안 통치하시며

그후에 산자와 죽은자들이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 것으로 나옵니다.

19장과 20장을 읽으시면 이 점이 분명히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은 세상을 친히 통치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며,

산자와 죽은자의 심판은 천년후에 있을 일인 것입니다.

저는 무천년설을 안믿습니다!

저는 천년왕국과 그 이후의 심판을 믿으며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무천년설에 근거한 것으로 읽혀지며 저는 이 대목을 거부합니다.

 

 

그분은 거기로부터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오십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고장난 벽시계(사도신경) 앞에

정확한 시계(성경)을 갖고서

하루 종일 앉아서

그 고장난 시계가 언제 정확한 시각을 맞추는지 한번 뚫어지게 계속 쳐다보십시오.

하루에 두번 정확히 맞춥니다!

그것은 정확한 시계(성경)가 가르치는 시각이 고장난 시계가 고장난 지점을 통과할 때 두번 일어납니다!

이 고장난 시계(사도신경)도 이 대목에서는 맞았습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이 고장난 시계가 정확한 시각을 맞추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24시간 동안 잠 안자고 뚫어지게 쳐다보아야 하겠습니까?

 

 

이 대목은 맞았습니다!

 

 

거룩한 공회와(Holy Catholic Church)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공회는 홀리 카톨릭 쳐치를 번역한 것입니다.

칼빈, 어거스틴, 카톨릭 교황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회라 하면 대개 바티칸 공의회, 트렌트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 에베소 공의회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들 공의회들은 성경읽기와 성경 소지를 금지시키기도 했으며(1229 툴루즈 공의회)

http://www.aloha.net/%7Emikesch/banned.htm

 

 

외경을 성경안에 포함시키기로 하고

기독교 개혁운동을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하였으며( 트렌트 공의회 1545-63),

카톨릭 밖에는 구원이 없다든가( 라테란 공의회 1215, 플로렌스 공의회 714) 등의

매우 엉터리 도그마를 주장해왔습니다.

또한 카톨릭은 마리아가 공동 구속주라고 주장하기도 하였고

현재도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저는 거룩한 공회가 일반 카톨릭 교회를 칭하든,

아니면 바티칸 공의회나 트렌트 공의회, 에베소 공의회등을 칭하든 저는 거룩한 공회를 안믿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살육하였으며 쟌 후스가 화형당한 것도 콘스탄스 공의회에 의해 정죄받아 죽은 것입니다(1415)

그는 루터보다 100여년 먼저 면죄부 교리와 싸웠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Jan_Huss

 

 

한마디로 저는 거룩한 공회 안믿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두 세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입니다(18:20)

 

 

거룩한 공회를 믿지 않사오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것은 카톨릭의 성인 통공을 다르게 번역해놓은 것입니다.

카톨릭은 죽은 신자들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경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도입니다(고전 1:2).

그들은 늘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으며 교통이라는 단어도 교제라는 말이 적합하지 거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가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바로 카톨릭에서 말하는

성인통공을 의미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인 통공이 무엇입니까?

죽은 성도들에게 기도하면 그들이 중보기도 해주고 하나님께 전달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잡신교, 무당들이 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이나 강신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수천의 죽은 성도들에게 전세계에서 기도하며

그들 죽은 성도들은 어디에서든지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것으로

죽은 성도들이 신으로 바뀌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카톨릭이 다신교임을 다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는 그들 많은 신들 중에 하나이며 마리아는 그 신들의 어머니 인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 안믿습니다!

성인통공을 믿지 않사오며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당신은 이 말을 믿습니까?

이 말의 저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앞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분에서는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진리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말은 현재와 앞으로 죄를 사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매주일 "미사"(라틴어로 희생)를 거행합니다.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비슷한 희생제사를 매주일 지내며,

그것을 통해 죄가 매주일 용서되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미사"에서는 한번도 인류의 모든 죄가 이미 십자가에서 사해졌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믿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사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날에 위대한 함성으로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인류 구속의 대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더 이상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고 선언합니다( 10:17-19).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가 매주일 새로 발생하므로

다시 희생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안믿는 행위이며 짓밟는 행위입니다.

"미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하고 그분의 피흘리심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까지 이미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사해졌으며 깨끗하게 되었다고 선언한다면 다음 주에 "미사"를 다시 거행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에서는 정확한 십자가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모든 죄가 이미 십자가에서 사해진 것을 믿으며,

이제야 희생제사로 죄를 사해주신다는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사 죄를 사해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희생없이, 속죄 예물 없이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주일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피흘리시고 죽으셔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의 피흘리심은 영원한 효력을 갖추었습니다(9:12)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의 죄를 사해주실 때,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마저도 이미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피흘리시고 죽으셨음을 깨닫게 하심으로 사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사함은 2천년전의 십자가에 근거하는 것이며 이제야 사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모든 죄가 이미 십자가에서 사해진 것을 믿으며,

이제야 희생제사로 죄를 사해주신다는 주장을 믿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죄를 사해주신 것을 믿사오며,

다시 희생제사 드리는 것(미사)을 안믿사오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우리가 부활할 때는 새로운 몸을 입습니다.

우리 썩을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광의 몸을 입습니다(고전 15:35-54)

우리는 부활시에 썩지 않을 몸을 입습니다.

우리의 현재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자가 순식간에 썩지 않을 몸을 입고 부활하며 우리는 변화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입니다(요일 3:2).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함을 믿사오며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고장난 시계가 또 한번 정확한 시각을 맞추는 순간입니다.

 

 

결론

이런 사도신경을 매주일 암송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태 복음 67절에서 말씀하신 바와같이

헛된 반복으로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이 되며 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지 않게 합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이나 초대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하였다는 말도 없거니와,

사도들이 그 신경을 썼다는 말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것은 수백년 지난 다음에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신경을 외우게 하느니 차라리,

성경 말씀 그대로를 외우도록 성도들이 행한다면 훨씬 더 정확한 신앙으로 자라게 할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외우기에 좋은 성경입니다.

또 디모데 전서 316절은 기독교 진리의 대강이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입고 나타나셨고,

()으로 의롭다함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어지시고,

영광 중에 올려 받아지셨느니라.

 

 

하나님은그는 으로 바꾸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하게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여호와의 증인과 논쟁하면 킹제임스 성경을 절대 인정못한다고 말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여호와의 증인이나, 이단들이 아주 싫어하는 성경이며 가장 정확히 번역된 성경입니다.

물론 약간의 오류는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구절은 초대교회의 찬송가였던 것으로 저는 믿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교리의 중요 부분을 찬송가로 가르쳤음을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사도신경보다는 위의 성경말씀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몇 년전에 제 아들이 나가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저희 모임에 나간다고 말하니까,

그 친구들이 젊은 목사를 불러왔습니다.

그 목사는 이단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으로 두가지를 제 아들에게 물어보았는데,

하나는 신학대학을 나온 목사가 가르치는지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신경을 외우는가 여부를 물었습니다.

제 아들은 둘다 아니라고 말하니까, 이단인 교회라고 판정해주었습니다!

 

 

신학대학은 성경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두란노 학당(19:9)은 바울이 세운 것이 아니라, 도시 국가 왕들이 세운 왕립학교였으며 바울은 그 장소를 빌려서 안믿는 자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새로 믿는 자들이 많이 복음을 들었던 것입니다.오늘날의 목사제도는 성경에 있지도 않으며, 간통목사등의 오늘날 수많은 교회의 타락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오직 두 가지 직분이 있을 뿐이며 장로와 집사이고 장로는 감독이라고도 불리웠습니다(20:17, 28)

성직자 제도는 예수님이 미워하시는 니골라당의 행위와 교리를 말합니다(2:6, 15)

 

 

이제 사도신경은 오류투성이요, 온전치 못하므로 암송할 것이 못됨을 아셨을 것입니다.

이래도 당신은 사도신경을 믿습니까? 거룩한 공회와 성인통공을 믿습니까?

 

 

바로 알고 바로 믿는 신앙(信仰)

그 신앙이 참으로 귀중한 선택이고

()로운 값진 현명한 선택을 하시는 귀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출처 : KOSMOS
글쓴이 : 코스모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