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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땅밟기 기도에 숨겨 있는 이교적 사상

끝까지주를위해 2010. 11. 10. 16:53

땅밟기 기도에 숨겨 있는 이교적 사상
2010년 11월 04일 (목) 08:18:28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대림감리교회 이인규 권사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협력상담위원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 운영자


최근에 어느 절에서 두 손을 들고 축도하고 땅밟기 기도를 하는 청년들이 만든 동영상이 공영방송을 통해 비판적으로 보도되어 기독교가 세간의 비웃음 거리가 되고 있다. 결국 그 선교단체의 목사와 청년들은 봉은사에 찾아가서 큰 절을 올리고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조금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이 땅밟기 기도가 과연 일부 단체에서만 행하여졌고 과연 봉은사에만 행하여진 일일까? 단순히 혈기 왕성한 젊은 청년 기독교인들의 일회성 장난으로만 있었던 것일까?

필자는 2009년 12월10일 객원칼럼에서 “땅밟기, 십자가 묻기가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글을 통하여 이미 땅밟기를 비판한 적이 있다. 또 얼마 전 발간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라는 책 2권 250쪽에서 다시 한번 땅밟기와 그것을 시행하는 선교단체에 대해서 비판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밟기 기도가 한국 기독교의 무속적인 요소가 혼합된 것이라고 단순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 땅밟기 기도의 배후에는 극단적 세대주의와 신사도운동의 이단적인 논리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땅밟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행하는 단체로는 예수전도단, 인터콥, 신사도운동 단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영적도해”라는 개념을 주장하면서 땅밟기 기도를 당연시해왔다.

피터 와그너는 <지역사회에서 마귀의 진을 헐라>라는 책을 발간하였고, 신사도운동의 밥 베켓은 <지역을 바꾸는 기도>라는 책을 발간하였으며, 예수전도단의 존 도우슨은 <하나님을 위하여 도시를 점령하라>라는 책을 발간한 바 있다. 또 신사도운동을 추종하는 와그너 신학교(WLI, 홍정식목사)에서는 영적도해와 지역 신에 대해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땅밟기가 무엇인가?
아래는 국민일보에 난 기사로서 영적도해의 전문가이며 예수전도단의 밥베켓이 WLI 강의를 위하여 내한했다는 기사이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 sid1=103&oid=005&aid=0000157693).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교회부흥은 중보기도가 필수”…영적도해 전문가 밥 베켓 목사 내한

“영적도해 전문가인 밥 베켓(Bob Becket)목사가 16일 내한했다. 베켓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 헤밋에 있는 장막교회(Dwelling Place Family Church)를 담임하며 중보기도자를 위한 사역훈련을 펼치고 있다. 특히 영적도해(spiritual mapping)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적 도해란 말 그대로 영적인 지도를 그리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란 지역을 위한 중보 기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중보하겠다는 헌신입니다.’

베켓 목사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기에 기도에 있어서도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접근을 하고자 하는 성향을 보인 것이라는 이야기도 듣고 있다’며 ‘그러나 영적 지도를 만들게 된 것은 순전히 성령의 인도함이었지 개인적인 발상은 아니었다’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28년 전 저희 부부를 헤밋(Hemet)으로 인도하셨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경험케 하신 뒤 그 장소들을 지도에 표시하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처음 15년간은 혼자서만 이 일을 하다가 어느 날 피터 와그너 박사님께 영적 지도를 보여드렸고 빨간 점으로 표시된 지점들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헤밋을 향한 구체적 전략이 세워졌고 도시가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한 도시의 영적 지도를 그리려면 먼저 그 도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조사하면서 그 도시의 성격을 파악한다. 그리고 그 도시의 성격을 이해하면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사단의 움직임을 알게 되고 구체적인 중보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베켓 목사는 ‘지역을 위해 중보하며 헌신하는 일이야말로 그 지역에 있는 중소교회들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문제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세력을 향해 영적 전투를 전개할 때 그 도시는 정결하게 변화되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베켓 목사는 19∼22일 분당 만나교회에서 열리는 WLI(와그너 사역연구원·www.wli.or.kr) 개교 컨퍼런스 강의차 방한했다.”

밥 베켓이 말하는 영적도해라는 것은 세상을 하나님의 영역과 사탄의 영역으로 구별하는 지도를 말한다. 즉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세력이 대결하는 두 가지의 영역적인 개념으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선·악이 이 세상에서 서로 대등한 세력을 갖고 대립하고 있다’는 이방사상인 이원론에 기초를 둔 것이다. 영적도해를 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역을 정한 다음 땅밟기를 하면 그 지역의 귀신이 쫓겨나가고 약화되며 하나님의 영역은 반대로 확장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여 땅밟기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선과 악의 두 근원 혹은 두 대결로 보는 이원론에 기초한 영적도해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땅밟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여리고성의 사건을 인용하기도 한다. 만약 여리고성을 돌았던 땅밟기가 땅의 저주를 푸는 방법이 되고, 어떤 주술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면, 왜 다른 성경과 신약에는 왜 땅밟기로 저주를 풀었던 경우가 없었을까? 만약 여리고성의 사건을 그대로 적용시키려면, 여리고성을 돌았을 때에 불었던 나팔도 함께 불어야 하고, 언약궤도 뒤에서 따라야만 하지 않는가? 또 큰 소리도 질러야 하지 않는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수 6:2~5).

관련자료보기=☞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어떻게 무너뜨렸나?

땅밟기로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그 땅밟기라는 행위가 주술적인 효과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라고 불리는 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뭇가지를 물 위에 던짐으로 쓴물을 단물로 바꾸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나뭇가지를 쓴물에 던지면 단물이 될까? 혹은 모세의 경우와 같이, 지금도 전쟁이 날 때마다 지도자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하여야만 승리를 할까?

이러한 의식과 행위는 모두 모형적인 것이며, 그림자로서, 단회적인 구약의 사건들로 보아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각각의 사건마다 지시하는 형태가 모두 달랐으며, 어떤 동일한 향태가 계속적으로 반복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의식과 형태에 집착하면 주술적이거나 무속적인 우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본질적으로 믿음과 기도로 영성을 채우기에 충분하며, 모든 저주와 권세는 어떤 의식과 행위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온전히 이길 수 있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경적인 실제적인 사건을 살펴보자.
광야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뱀에 물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의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8~9).

이 사건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속사적인 사건이 된다.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의미로 비유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광야의 놋뱀의 사건을 직접 설명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우리는 이 예표적인 의미를 잘못 오해하면 안된다. 이 장대에 달렸던 놋뱀 자체는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 본질이 되어야만 한다. 이 놋으로 만든 뱀을 어떤 주술적인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 놋뱀은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일부는 그 놋뱀을 보관하고 있었고, 그것을 분향하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왕하 18:4).

‘느후스단’이라는 히브리어는 ‘구리로 만든’이라는 뜻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리라고 하셨고,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다. 그러나 놋뱀 자체는 구리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적 대상이 아니며, 놋뱀 자체에서 어떤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놋뱀은 상징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 본질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제외된 모형은 우상이 되어 버린다.

오직 예수님이 유일한 방법이며, 유일한 이름이다. 다른 방법들은 우리 신앙에 어떤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방법이 되지는 못한다. 예수의 이름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거나, 그 이름의 가치를 약화시킨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만약에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땅밟기를 하였기 때문에, 혹은 십자가를 묻었기 때문에 그 행위의 효과가 있었다고 말할 것인가? 더 이상 유치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무속화시키지 말아야만 한다. 제발 기독교의 수준과 차원을 높이자. 제자들이 귀신을 쫓지 못하였을 때에, 제자들이 왜 귀신을 쫓지 못하였는지를 질문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은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사람들은 종교에 따라서 혼합주의, 다원주의, 포괄주의, 유일주의, 배타주의로 구별한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코란이라고 주장했던 이슬람교는 배타주의라고 말한다. 그들 중에서 극단적인 자들은 자기 목숨을 순교하면서 타종교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주의를 주장하여야 하지만, 배타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래 전부터 절에 돌맹이를 던지거나 불상의 목을 자르는 등 극단적인 기독교인들이 간혹 있었는데, 이는 종교적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만일 불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와 십자가를 떼어내고 건물을 부순다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가톨릭은 세상종교와 타협을 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포괄주의를 주장하는데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행 4: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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