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화장(火葬)하면 부활을 못하나요?
부활에 관한 궁금증들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후에 시체를 화장하면 부활을 하느냐? 못 하느냐?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을 볼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육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보내주신 분께 돌아가는 문제입니다. 요즘 어느분이 갑자기 저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화장을 하면 부활을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 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것을 한탄해야 합니다. 매일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없는 것에서 말씀으로 있게 하시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 입니다. 그런데 화장하면 부활을 못 한다고 한다면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시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못하는 하나님이신가요?
죽음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외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담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나고 죽은 사람의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많을 것 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원인을 육신의 노화나 질병이나 사고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며, 죽음의 원인이 아담의 범죄에서 비롯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고 죽음도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이 생겨났으며, 죽음은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에 율법에서 요구하는 죽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인성을 갖고 계셨으나 죄가 없으셨으므로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셔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석가나 공자, 마호메트와 같은 성인들이 하나같이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의 무덤은 지금도 남아 그들이 죽음에게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천하를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도,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도,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도 다 죽어 무덤에 누워 있습니다. 세계적인 대 재벌들도 죽음 앞에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큰소리 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행전 2장 23절-24절에『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면 죽음과 관련해서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도 죽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성격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이 전혀 다릅니다. 이방인에게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죄값으로 죽음을 맞은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에 매장, 화장, 수장, 풍장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며 종교나 사회의 전통과 문화에 따라 달라집니다. 불교와 힌두교를 믿는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는 화장이 보편화 되어 있는데 기독교와 천주교를 믿는 서양에서는 매장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굴을 파서 매장을 한 것을 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무덤은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무덤을 크고 화려하게 장식하건, 화장해서 가루를 산이나 강에 뿌렸건 간에 죽음에게 삼킨바 되었다는 점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죽음의 저주가 제거되었으므로 하나의 통과 의식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것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자는 것은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부활한 신령한 몸을 갖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곧 그를 믿는 성도들의 승리요, 그의 부활은 곧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에서는 화장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유교 사상을 가진 중국의 영향으로 매장을 선호하고 화장은 기피했습니다. 일본이 93%, 중국이 50%, 홍콩이 70% 화장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19.5%에(1990년 경 통계) 불과해 해마다 20만 개의 분묘가 늘어나 작년 한 해에 여의도 1.2배에 해당하는 국토가 묘지로 변하고 국토의 0.9%(남한)가 묘지이니 이런 추세로 가면 죽은 사람들 때문에 산 사람은 설 자리가 없게 되므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화장제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도 매장이 명예로운 장례법으로 기록돼 있는데 반해 화장은 복수(삼상31:12), 불의(암6:10), 형벌(레20:14; 2l:9 수7:25)로 시행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화장을 금지하는 말이 없고 더구나 한국인의 매장 선호가 전통적 유교 사상과 조상 숭배, 묘를 잘 쓰면 자손이 잘 된다는 미신적 풍수지리설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화장의 실용성, 저렴한 비용,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면에서 볼 때 기독교도 화장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천주교에서는 매장 후 20년이 지나면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안치하는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궁금증들
화장이 부활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고대 애굽의 미라나 성경의 무대가 된 고대 중동사회에서 주로 매장을 한 것은 영혼이 다시 돌아올 때 필요한 물질을 제공한다는 사상이 잠재 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부활은 어차피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육체적인 잔유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며 매장도 결국에는 육체가 완전히 소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창세 이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집안 선대들도 5대 이상은 자손들이 관리하기 힘들다하여 집안이 모여서 파보니 아무것도 없이 흙 한줌만 있는 것을 일괄적으로 화장하여 없애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묘들을 한곳에 모았습니다. 히브리서1장11절-12절에『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바울은 이제까지 부활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들을 소개했습니다. 그 다음에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우리는 다 사기꾼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깨어 의를 행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몸은 죽으면 다 썩어서 흙이 되어 없어지는데 어떻게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까? 화장을 해서 한 줌의 가루만 남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리고 어려서 죽으면 어린이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늙어서 죽으면 하얀 수염을 달고 부활하나요? 암이나 다른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그리고 바다에 빠져 죽어서 물고기가 다 먹은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때 300년 동안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사자밥이 되고 불로 태워 죽었고 기름으로 튀김이 된 육체는 어떻게 부활하나요? 그리고 도대체 언제 이런 부활이 이루어집니까? 그리고 부활이 있기까지 먼저 죽은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부활하면 서로 서로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여러분, 이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부활을 생각하면 수 많은 질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부활의 형체와 시기에 대해서 가장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지, 또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제부터 부활의 진리를 배워보겠습니다.
첫째,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고전15장 35-38절)
36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했습니다. 부활에 관한 첫 번째 진리는 죽어야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씨를 뿌리는 것의 신기함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추씨, 무씨 같은 씨를 땅에 뿌립니다. 그러면 그 씨앗은 땅에 묻혀서 썩어서 죽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 씨가 뿌려졌던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배추씨는 배추로 자라나게 되고, 무씨는 무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씨앗에게도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왜 이런 일을 하실 수 없겠느냐는 말입니다. 고전37-38.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따라서 여기에서 바울은 세 가지 요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씨가 씨로서 죽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명체가 나타날 수 없듯이, 우리 사람의 육체도 죽어서 썩어지지 않는다면 부활의 육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씨앗만 보고 미래의 식물의 형체를 알 수 없듯이, 사람은 현재의 육체를 보고 부활의 육체가 어떠할 것인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나 씨앗과 그 씨앗이 죽음으로 생겨난 생명체 사이에 서로 연속성이 있듯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 사이에도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활할 몸은 현재의 몸과는 전혀 다른 몸입니다. 그러나 그 몸은 현재와 전혀 상관없는 몸이 아니라 사과씨와 사과나무의 관계와 같이 서로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이 죽어야, 이 몸이 썩어야 새 몸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입니다. 병들어 죽은 사람이 다시 그 육체를 입는다고 생각해 보시면 좋겠네요. 병들어 죽은 육체를 다시 입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새로운 육체를 입기를 바라십시요. 새로운 몸은 시간과 공간과 영원히 썩지않는 신령한 몸 입니다.
둘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까?(39-49)
39절부터 바울은 여러 형체를 예를 들면서 부활의 육체가 어떤 몸을 입게 될 것인가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육체가 다 다르고 또 각 형체가 각각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에는 여러 육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땅의 짐승은 털이 있고 네 다리를 가지고 힘차게 달릴 수 있습니다. 공중의 새는 큰 날개와 작은 머리를 가지고 높이 날 수 있습니다. 물고기는 유선형의 몸체와 지느러미를 가지고 빠르게 헤엄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따라 각각 종류대로 서로 다른 육체를 가지고 있듯이, 부활의 육체도 각각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온 우주에 있는 천체들도 각각의 영광이 다 있습니다. 햇빛이 다르고, 달빛이 다르며, 별빛이 다릅니다.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고, 별의 영광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육체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에게 딱 맞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형체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듯이 부활의 몸을 입은 사람들도 모두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아본 것처럼 우리도 서로 서로를 알아볼 것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이고, 누가 베드로인지, 누가 정장로님이고, 누가 김목사인지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 오셨군요! 목사님도 오셨군요!”하며 반갑게 인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포옹도 하고, 감격의 눈물도 흘리다가 “예수님~”하고 달려 나가 주님 품에 안기고 면류관도 받아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날만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 벅차고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 부활의 육체의 영광이 어떤 것 인가를 구체적으로 네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고전15 장 42절-44절에『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첫째,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삽니다. 이것은 부패와 부패되지 않음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육체는 부패할 육체입니다. 질병과 노화와 죽음의 씨앗이 이 육체 안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육체가 죽어서 썩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육체는 영원히 썩지 않는 육체입니다. 질병도 없고 늙는 것도 없는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둘째,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삽니다. 서양 사람들은 장례식 때 죽은 자들을 보기 좋게 화장하고, 좋은 옷을 입히고, 멋있는 관 속에 안장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합니다. 그러나 결국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큰 욕과 불명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몸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셋째,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삽니다. 현재의 육체는 몇 시간만 일해도 쉽게 피곤을 느끼고 쉬어야 합니다. 게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사실 육체는 한없이 무기력해 집니다. 아무 힘도 쓸 수 없고 숟가락조차도 들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육체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육체는 이런 모든 연약함을 벗어버리고 강인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삽니다. 육의 몸이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육신의 연약함을 지닌 몸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한탄한 것과 같이 선을 행하고 싶어도 여전히 죄만 짓고 사는 우리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사탄과의 싸움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픽''픽' 쓰러지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열심을 내서 순종하고 충성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날에 우리의 육체는 더 이상 죄의 도구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몸이란 성령의 지배를 완전히 받는 육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고, ‘죄야 안녕~ 사탄아 굿바이’하며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는 영화에 이른 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타나는 부활의 원리는 영원히 썩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는 영광스럽고 강한 몸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는 영화의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고전15장 50절-54절)
바울은 여기에서 한 가지 비밀을 말합니다. 51절『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신자들이 간직해야 할 비밀은 다름 아니라 마지막 나팔 소리에, 우리 주님의 재림나팔 소리에 다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죽어서 무덤 속에서 잠자던 성도들도 다 이 나팔소리를 듣고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어서 믿음을 지키는 자들도 순식간에 영화롭게 변화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산 자들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최후의 위대한 승리는 바로 사망을 완전히 정복하시는 것입니다. 고전15장 54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서 25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마지막 날에 사망이 완전히 멸망 받고,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최고로 기름진 음식과 가장 맛있는 포도주로 큰 잔치를 벌여 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바로 그 날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재림의 날이요 부활의 날입니다. 그 날에는 사망이 사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하고 변화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우리를 무덤 속에 가둬둔다 할지라도 영원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잠깐 낮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인류를 괴롭히고 마치 자기가 왕인 것처럼 으시대는 사망을 불러냅니다. 사망을 향해 호통 칩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는 나를 붙잡을 수 없다! 너는 나를 가둬둘 수 없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나는 너에게 승리했다!”(55) 이것이 바로 바울이 사망을 향해 외치는 승리의 노래입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56절). 사망은 죄라는 독화살을 우리에게 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인생은 마치 독화살을 맞은 사람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비실 비실 살다가 죽게 됩니다. 죄 때문에 무기력하게 살다가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56절). 율법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이 죄인가를 낱낱히 기록하여 결국 인간을 정죄하고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미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롬 3:23) 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인간은 죄로 인한 사망권세에 시달리고, 율법의 정죄에 시달리는 피곤하고 힘든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바울은 죄와 사망에 대해 최후의 승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사망이 완전히 박살나고, 율법도 완전히 박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노래는 승리의 노래요 환희의 찬가입니다. 사망을 향한 뇌성과 같은 책망이요 승리의 선포입니다. 사망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결 론
이처럼 사망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음을 정복한 사람들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둬놓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메시지요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주 안에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 한 방울, 땀 한 방울도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 주님께서 영광의 부활로 다 갚아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리란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 견고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의 복음 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며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위대한 복음증거자 무디(1837-1899)가 젊었을 때 장례식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장례식 설교를 하셨는가 궁금해서 복음서를 다 뒤져보았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님의 장례식 설교는 없고 오히려 죽은 사람을 명령해서 다시 살리신 일만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는 부활의 영광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디는 장례식에서 위로하는 설교를 하는 대신 죽은 자에게 이렇게 외쳤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그리고 먼 훗날 무디는 죽기 직전에 가족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다. 오늘은 나의 대관식 날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2000년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화장을 하면 부활 못한고 한다는 사람들이 살전 5장 23절에『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를 들어서 화장을 하면 부활 못한다는 말씀으로 오해하는데 이 말씀은 육체로 죄를 짓지말고 거룩하게 살으라는 말씀입니다. 한절만 보지말고 위 아래 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신앙보다 한차원 높은 믿음으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은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시되 새로운 영광체로 부활 시킨다는 것을 믿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고 부활을 선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