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믿음

[스크랩]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가? 순종의 조상인가?

끝까지주를위해 2011. 1. 27. 01:22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가? 순종의 조상인가? (히11:17~19)

글/扈一麥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17~19>

 

 성경을 읽으면서 또는 설교시간에 목사님들로부터 아브라함의 순종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 하여서인지 몰라도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행한 것보다 순종하여 행하였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찬들이 더 많은 것은 믿음보다 순종(행함)으로 가르쳐서 믿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면  그와 같이 우리도 하면 천국갑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갈바를 알지못하지만 말씀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갈바를 알지 못하지만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냐?  순종(행함)의 조상이냐?  이시간 일맥과 믿음으로 성경을 보기를 바랍니다.

 

1. 말씀에 근거한 믿음

 창세기 12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아비와 친척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12장 4절에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말씀에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 이라고 흔히들 말을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순종하는 것만 하였다면 아브라함은 순종의 조상이 되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창세기17장 19절에 아브라함이 99세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1년후에 아들이 있으리라 말씀하실 때『아브라함은 웃었습니다.』「그때에 아브라함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인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리요? 구십 세인 사라가 낳을 수 있으리요? 하고」웃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애를 낳을 수 있는 방법이 끊어진 나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어찌 100세된 노인이 애를 가질 수 있느냐? 이런 믿음을 볼 때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우리와 다를바 없는 그런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택하여「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이란? 뜻은 비웃음 입니다. 인간의 자연 법칙에는 젋을 때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씨를 심으면 애를 낳는 것이 자연법칙이고 노력으로 낳는 것입니다. 노력으로 생산해 낳을 수 있는 나이가 한참지나서 소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백세 된 남자와 구십세 된 여자가 애를 낳는다고 하니 믿음의 조상도 비웃음을 할 정도입니다. 사라도 웃었습니다. 창세기 18장12절에「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하였는데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이삭이라 불렀으니 아마도 이삭을 부를 때마다 비웃었던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삭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이삭을 낳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90세 된 할머니가 애를 낳을 수 있는 방법은 자연 법칙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100세에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지시하는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받게 됩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25년이나 기다려 기적으로 겨우 얻은 독자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려야 하다니....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은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아마 이런 딜레마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목사님들이 인간적인 생각만하고 이 부분에 많은 고통과 하나님을 원망하는 투의 설교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목사님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데 안타가운 심정에만 촛점을 두고 설교를 하셔서 저도 이 부분을 설교 할때 마다 연기를 해가면서 성도들을 자극해 왔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이삭을 데리고 3일길 모리아산을 향해 갑니다. 여기서 성경에서 놓친 부분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기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삭이 죽음으로 그의 생애가 끝난다면 이것은 약속의 폐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결코 폐기될 수 없는 것이라면 대답은 하나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록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기에 죽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삭은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했다는 것이다(19절). 그런데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구원에서 떨어질까하여 두려워 하는 자들을 많이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믿음이 있는 자인가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본문의 깊히 들어가서 보는 것보다 내 심정을 섞어서 순종으로 몰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버지가 눈에 넣어도 아까운 아들을 죽이기 싫었지만 하나님 말씀이니 순종하여 드렸다고 설명을 합니다.역으로 믿음으로 기쁘게 드렸다고해야 맞습니다.

 

 이를 뒷받침 해주는 말씀이 창세기 22장 5절 말씀입니다.「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5절 하반절 말씀을 잘 살펴보면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부활 믿음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히브리서11장17절-19절에「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아들을 약속 받았던 그 당시에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을 바쳤을때 의롭다 칭한 것이 아니고 믿을 때에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고나니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지않으시고 믿을 때에 의롭다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창세기 15장과 로마서 4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15장4~6절에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義로 여기시고

 

 로마서4장1~3절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표현보다는 믿음으로 나갔다고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 아들은 반드시 다시 산다”라는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환들에게도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라고 확신 있게 대답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고나서 의롭다 인정 받은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義로 여기시고 라고 말씀하신 것은 조카 롯과 헤어진 밤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진짜 죽이려 했나? 맞습니다 진짜 죽이려 했습니다. 급한 쪽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도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이삭이 태어나기 전 그랄왕에게 사라를 빼앗겼을 때도 아내를 도로 찿아주신 하나님이시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15장4절에「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참된 믿음은 말씀이라는 객관적인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 사람은 부활을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보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25절에「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아브라함은 예수님이 부활하기 이전에 이미 4,000년 전에 부활의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2. 시험을 통과하는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생애 속에서 시험을 통과하는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혹독한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남의 손에 죽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비극인데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식을 죽여야 하다니 부활의 믿음을 가진것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많은 시험을 받은 사람입니다. 때로는 실패하였고, 때로는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은 마지막 시험으로써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감당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허락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강인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혹독한 시험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부활의 신앙만이 우리를 시험을 통과하여 승리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리아 산에 도착했을 때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는 바로 대답을 합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그것이 믿음입니다. 창세기 22장7-8절에「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질 때가 38세쯤 입니다. 어린아이로 알고 계시면 해답이 안 나옵니다. 중동에 아브라함의 시대는 성장속도가 지금과 같지 않다는 것은 고고학자들이 이미 밝힌바 있습니다. 현대의 잣대로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순종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이삭은 사라가 죽은 다음 40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습니다.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질 때 믿음 아니면 도망가도 잡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물된 것처럼 이삭도 제물된 것을 믿음으로 받았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 외에 무엇으로 하여도 받지 않으십니다. 순종이라고 하지말고 믿음이라고 해야 성경이 풀립니다.

 

 부활이란? 뜻은 희랍어로 ‘아나스타시스’로서 ‘다시 일어섬’ 이라는 뜻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지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비록 죽어가는 목숨일지라도 부활 믿음을 가지면 죽음 건너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겁쟁이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요. 계집 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에는 변화를 받아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하고 있지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부활의 믿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됩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3. 주님께서 제물을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십니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도 없는 사람이 만든 교리에 얽매여서 열심히 순종하지 말고 기록된 말씀 속에 있는 것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드리는 것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죽음으로 인한 열매와 부활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의 삶이 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였다면 과연 이삭을 바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이 생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미련없이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여기에 대한 답으로 히브리서 11장 35절 하반절에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신약시대에도 주후 114년 안디옥 교회의 유명한 초대 감독이었던 이그니셔스가 로마 황제의 핍박으로 사형이 결정되었을 때 많은 신도들과 그를 존경하던 불신자까지 그를 구하고자 구명 운동을 하였지만, 오히려 구명 운동을 중지해 달라고 사람들에게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께 바치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그의 목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종으로 하면 못할 수 있습니다. 현재 당신에게서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 밖에 없는 이삭을 바치듯이 하나님도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을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요구가 결코 지나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6절에「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입니다. 우리 의로(행함)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에「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행함으로 의로워 진다면 예수님은 왜? 믿음을 요구하셨나요? 믿음은 구원이요,행함은 상급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도직이 떨어질까 하여 상 받기 위해 푯대를 항해 달려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우리도 주님께서 맡겨준 사명과 책임을 믿음으로 행해 나갈 때 상주시고 위로하시고 생명되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扈ⓗ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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