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저희와 다르다고 생각말라.
저희와 다르다고 생각말라. 글/김병덕 목사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늘 강조를 하지만 구약은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자를 보면서 아직도 그것을 그대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약의 그것들을 지키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았던 그 복을 받기 위해서는 구약의 규례와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구약이 그런 육신의 복을 위해 기록했다면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실체지 그림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 살고 못사는 것은 하나님이 고루 해를 비치고 또 비를 내리고 또 내가 수고의 땀을 흘리고 하는 것과 분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실체를 못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 그림자가 너무도 소중하고 그것을 보아야 하겠지만 실체를 확인한 성도는 굳이 그림자를 보려 하지 않고 실체를 통해 그림자를 확인해 나가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장미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백합이었습니다. 이제 장미라는 것은 머릿속에서 완전하게 지워야 하고 이전에 장미로 알았던 그것을 백합을 통해 다시 조명해 나가면서 믿음을 확증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모든 칭찬과 존경을 다 받았다 해도 그가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그는 멸망하는 짐승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를 아무리 잘 보았다 해도 천국이라는 답을 찾지 못했다면 그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도 집착을 하고 있지만 답을 찾아 나서려고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문제를 잘 보고 있는 자신이 답을 찾았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교회에서 멸망을 합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죽는 사람은 별로 억울할 것이 없지만 교회에 나와서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와서 가나안을 바로 목전에 두고 광야에서 죽는 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불쌍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일요일 날 예배를 안 드리고 자기 멋대로 살고 또 술 담배를 하고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을 보고 그들을 아주 불쌍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들은 안 불쌍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불쌍한 사람은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멸망을 당하는 그들이 가장 불쌍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 밖과 싸움이 아닙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느냐 하는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광야라는 교회에 60만이 들어왔지만 다수가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천만이라는 다수가 들어와 있지만 그중에 과연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 보시고 또 내 영혼에 대해서 정말 고민을 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치열한 싸움을 하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어 있고 나중에는 분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깨어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리에 대해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나와 보았자 다수에 속해 있는 자들은 결국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 뻔한 일입니다. 알곡과 가라지 같이 말입니다. 진리는 늘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늘 다수에 속한 자들은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자기는 소수에 속해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빼고 교회 안에 있는 다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전서 10장의 말씀이 누구에게 하고 있는 가를 누구를 예표로 삼았는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라는 교회에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을 섬겼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이단입니까? 그들은 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입니다. 이단이 아니라 정통에 속한 그들이었지만 결국 다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너무 안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과 규례를 주시고 또 성막을 만들게 하셨지만 그것들을 만드는 열심에는 최선을 다 했지만 자기들이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가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막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넘치는 성물을 자원해서 지어 놓았지만 그 성막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보이는 성막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규례를 지키고 또 율법을 지키는 대는 최선을 다 했지만 그 안에 있는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또 간음을 하고 또 시험을 하고 원망을 하다가 결국에 광야라는 교회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만약 지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바로 설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경계로 삼지 않았을 것이고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을 통해 다시 고린도전서에 기록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교회 역시 이스라엘과 또 같이 행하고 있기 때문에 경계를 삼으라고 말씀을 기록했는데 경계를 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 보다 더 우상 숭배를 하고 간음을 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또 원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치 말라기의 이스라엘과 같이 지금도 우리가 어떻게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을 하고 또 하나님을 시험하고 언제 원망을 했느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볼 때는 절대로 멸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 주를 멸시 했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를 더럽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자기들이 더러운 떡을 드린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냐면 그들은 율법에 나오는 그대로 깨끗한 떡을 드렸기 때문에 절대로 더러운 떡을 드리지 않았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제로 흠 없는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시대가 바로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행위를 보면서 우리가 언제 주를 더럽게 했느냐고 묻고 있고 우리가 언제 주를 멸시 했느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더러운 떡을 드리고 있습니다. 참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려야 하는데 이 시대는 정치 이야기 사회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목사나 장로의 어떤 행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심지어는 유머까지 동원을 하면서 떡을 더럽게 하면서도 언제 우리가 더러운 것을 드렸냐고 묻고 있습니다.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드리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드리고 있는 것이 너무도 깨끗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교인들의 눈에는 너무도 귀하고 깨끗한 것을 드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반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말라기 시대와 이 시대가 어쩌면 그리도 같은지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냈던 그 시대 멸망을 당했던 그들과 똑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힘들게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전체가 그렇다고 보아야 합니다. 조상들에게 약속을 하신 땅이면 그냥 들어가면 되는데 굳이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그 땅을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너무 좋은 곳입니다.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천국은 마음으로 믿어 가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눈으로 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천국을 믿음으로 가려하지 않고 자기 눈으로 보고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곳은 우리가 눈으로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400년 전에 조상들이 애굽으로 내려오기 전에 보았고 자기들은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땅입니다. 자기 조상들에게 반드시 주시겠다고 언약을 했던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땅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이스라엘은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예표로 보여 주시는 가를 알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있는 자기들보다 강한 아낙 자손과 그리고 여러 민족과 싸워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는 그냥 믿음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교회 안에 들어와서 천국을 바로 문 앞에 두고 여러 가지 행위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감히 넘지 못할 성읍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보다 더 강한 내가 온전히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이 보이는 것입니다. 천국을 싸워서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은 원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겠습니다.
민수기14:1절을 보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지금 이 시대도 천국에 가기 위해서 밤새도록 곡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왜 곡을 합니까? 자기를 눈으로 보니까 도저히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가를 잘 알고 있는데 율법을 보고 또 어느 특별한 행위들을 보고 하니까 자기는 도저히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거룩한 신부가 되어야 천국간다고 밤새도록 소리를 높여서 곡을 하고 있습니다. http://cafe.daum.net/ilmak
그런데 우리를 대적하는 율법을 보니까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을 스스로 정죄를 하면서 왜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셨냐고 이왕에 인도하시려면 율법을 다 지켜서 이길 수 있게 해 주시지 율법을 보니까 감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성벽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천국 정말 좋은 곳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정말 좋은 곳인데 막상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자기보다 더 강한 원수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지키고자 하는 율법입니다. 그 율법의 행위를 자기 자신에게 비춰 보니까 이제는 자신이 없고 하늘을 보면서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강한 원수를 보면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원수와 싸우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싸워서 들어가려면 도저히 자신이 없기 때문에 원망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싸워주시면 나는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냥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믿음이 없어 자기가 싸워서 들어가려고 하다가 스스로 정죄에 빠져 죽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면 나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 원수 내 대적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내가 비록 율법을 못 지켜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님이 나를 기뻐하시면 내 원수와 싸워서 이기셨기 때문에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수가 믿지를 못해서 가나안 목전에서 들어가지를 못하고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구세주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수와 당당히 싸워서 이겨서 들어가려고 지금도 밤을 새워 가면서 울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지고 마는 자기의 육체를 보면서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원수와 싸워서 이기신 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를 보면 원망합니다. 천국은 눈으로 보아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믿음은 생깁니다. 믿음으로 어떻게 구원받는냐는 사람들은 지금도 밤새워 울며 이를 갈며 원망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