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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네 이름을 부르는 자를 알게 하리라

끝까지주를위해 2011. 3. 29. 00:18

네 이름을 부르는 자를 알게 하리라

이사야 45:1-13

자녀들은 자기 부모를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안다면 어디까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실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수고한 것을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수고를 하며 어떻게 키웠는가를 알지 못 할 때 부모는 크게 실망을 합니다.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

그런데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안다고 하지만 부모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부모를 안다고 할 때 나이와 생일을 알고 키와 몸무게를 안다고 해서 부모를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모를 안다고 할 때 자녀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며, 어떻게 키워주셨는지를 모르면 부모를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수고를 하셨는지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는 알아주면 부모는 좋아합니다.

자녀들이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를 잘 모르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아주 작은 것 정도를 알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 지금도 나에게 어떻게 하시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4)고 하시며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게 알게 하리라”(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심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아주 작은 것을 알 뿐입니다.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레스에게 가르쳐주신 하나님을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엇과 같은 존재라고 하셨습니까?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9)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질그릇 같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본질이 흙 한줌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줌의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줌의 흙과 같은 존재로서 주장할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그릇 중 한 조각 같은 자”라고 한 것은 깨어져 떨어져 나간 버려진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질그릇의 ‘한 조각’이라 한 것은 더구나 더 쓸모없는 버려진 존재와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그릇의 한 조각’은 재생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놋 그릇이나 다른 그릇은 깨어져도 재생하면 더 좋은 것으로 새것처럼 되기도 하지만 질그릇의 한 조각은 더 이상 재생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재생하려고 성형수술도 합니다만 늙어지고 병드는 것은 막지 못합니다. ‘질그릇의 한 조각 같은 자’란 재생도 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이처럼 질그릇의 한 조각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자와 다툰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의 한 조각 같은 자가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9)고 말 하듯이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란 자기 권리나 주장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면서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9).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불신이기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1-3).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보화와 재물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고레스는 바사 왕으로 이방인이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여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네게 ...보화와 ... 재물을 주어”(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재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보화와 재물이 ‘은밀한 곳에 숨어 있다’고 했습니다. 재물은 험한 곳, 놋문으로, 쇠빗장으로 막은 흑암중의 은밀한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이기 때문에 재물을 가지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재물을 가지기를 소원합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합니다. 수고를 많이 하지만 재물 얻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에게 재물을 주시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그의 오른 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1).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셨듯이 우리의 오른 손을 붙들어 주셔야 재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것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보화와 재물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셨느냐고 말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때 하나님은 앞서 가서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흑암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신 분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3,4). 고레스는 이방인으로서 자신을 택하시고 불러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택하셨고 지명하여 불러 주셨고, 칭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내 목자라”(44:28)고 하며 예루살렘 성전에 기초를 놓게 하고 성을 중건할 자라고 했습니다. 고레스를 통해서 이렇게 택하여 주시고 지명하여 불러 예루살렘 성전을 위하는 자로 삼으신 것을 고레스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불러 주의 백성 삼으시고 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 주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자가 됩니다. 부모를 알지 못하는 자식처럼 하나님께서 불러 주심을 알지 못하는 불의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심과 창조주가 되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5-7). 고레스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알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을 너는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5,6)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바사 왕국은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불사르고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 성전 귀물로 술을 마시다가 벽에 쓴 글을 보고 기겁을 먹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에게는 하나님께서 일찍 택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주가 되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7),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1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지금도 진화론이 만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였다고(7) 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평안한 것도, 평안치 못한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 평안의 복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려워 떨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안히 가라’, ‘평안할지어다’는 말씀으로 평안의 복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모두 원합니다. 그러나 평안이 어디로서부터 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는 사람들은 우상들이 평안을 주는 것으로 알고 우상에게 평안을 빕니다.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는 분이심을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를 안다고 하지만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느 만큼이나 수고하셨는가를 아는 자녀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병드시고 쇠약해서 스스로 걷지 못해 몇 번 업고 병원에 간 일이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업었을 때 제 생각에는 아버지는 내가 아플 때 나를 업고 병원으로 숨가프게 달려 가셨던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나를 얼마나 업어 주셨는가를 생각하며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아버지를 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셨는가를 다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사랑으로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고 빛을 주시고 평안도 주셨지만 그 뿐 아니라 구원의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가를 어느 정도는 안다고 하지만 더욱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부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8)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적인 표현으로 ‘공의’와 ‘의’, ‘구원’을 창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깊은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는 사망이라는 진리 때문에 죄인들을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를 이루시고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요즘 천안함 함몰로 죽은 군인들의 부모 마음이 어떨까를 생각해 봅니다. 장성한 아들이 죽은 시체가 되어 들려오는 것을 보는 부모는 자신이 죽기보다 더 괴로울 것입니다. 아들이 살아날 수 있다면 자신이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신 자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되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공의를 통해서 의와 구원을 성취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디까지 알아야 합니까?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공의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내 죄를 대신 갚으시고 의를 이루시고 구원의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질그릇의 한 조각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네가 만든 것이 그의 손이 없다’고 말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 키워주신 ‘부모님에게 무엇을 낳았소,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화를 받는 미련한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명하여 불러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분이심을 믿고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허창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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