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

[스크랩] 법궤(율법)과 신약교회

끝까지주를위해 2011. 7. 30. 00:41

법궤(율법)와 신약교회 (작성자 : 최 승 목사)

 

 

* 법궤가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이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이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이 지성소이고, 지성소의 중심이 법궤이다.

 

이와 같은 법궤가 오늘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면.......

 

구약에서 법궤는 하나님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물건이었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물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며, 가끔은 하나님 자신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법궤를 나에게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구약의 하나님이 나와는 관계없는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인데........

 

 

*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었는가?

 

법궤가 의미하는 것을 볼 때에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하나님은 분명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방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이 법궤의 의미였다.

 

때문에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것이지만 이방인과는 무관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 법궤는 과연 무엇인가?

 

말 그대로 법을 담아놓은 상자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는 장소였다. 법궤는 의미적으로 하나님 자체이다. 또한 법궤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언약의 상징이다. (언약궤)

 

이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간에 계약이다. 너희는 내 백성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계약이다. 그러면서 이 법궤를 성소 안, 그것도 휘장으로 가리우고, 그 안에 보관하며, 일 년에 단 하루, 대 제사장 단 한사람만이 그 법궤 위에 임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다.

 

 

* 법궤 안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일반적으로 세 가지를 이야기 한다. 언약의 두 돌 판과 만나가 든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말한다. 과연 이 세 가지가 들어 있을까? 세 가지가 들었다고 하는 것은 신약의 (히브리서 9장 4절)에 근거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말하는 것은 다르다. 왕상(8:9)에 의하면 돌 판만 있다는 것이고, (신명기 10장 1-5절)을 보면 법을 기록한 두 돌 판은 분명히 언약궤 안에 넣었다고 기록한다. 두 돌 판은 분명 궤안에 있다.

 

그런데 (민 17:10)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궤 앞에 두었다고 말한다. (출 16:33)에서는 만나가 든 항아리를 여호와 앞에 두었다고 말한다. 또 모세가 기록한 율법의 말씀(토라 - 모세 오경)은 (신31:24)에 법궤 곁에 두었다. 분명 법궤 안에 넣은 것은 두 돌판 뿐이다.(왕상 8:9, 대하 5:10) 이곳에서는 두 돌판 뿐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신약의 히브리서에는 법궤 안에 세 가지 것이 들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580년 전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가 될 때 이미 그때 법궤가 없어졌다. 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난 때에 그 법궤는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헤롯 성전에는 법궤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바벨론 포로 후 성전이 재건되기는(제 2성전) 했지만 법궤는 다시 찾아 올 수 없었다. 예수님 당시 헤롯성전에는 법궤가 없었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법궤는 지성소의 지하에 숨겨져 있다고 변명한다. 또한 법궤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유대인들은 말한다.

 

히브리서는 법궤가 사라진 후로 600년이 지난 다음에 전해져 오는 것을 듣고 적었다. 이것은 법궤와 법궤 곁에 두었다고 말하는 것들을 모두 적은 것이다.

 

 

* 한 번 더 질문한다. 법궤는 과연 무엇인가?

 

법궤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과의 계약서를 담은 궤이다. 법궤안의 두 돌 판에 기록된 것은 무엇일까?

 

한국 교회 성도들은 누군가가 그려놓은 이미지에 지배를 당하고 있다. 즉 두 돌 판에는 십계명이 새겨져 있다고 알고 있다. 그것도 한 쪽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록한 천륜 계명, 다른 한쪽에는 사람과의 관계를 기록한 인륜 계명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십계명도 기록 되어져 있다.(신4:13) 또 율법과 계명도 기록 되어져 있다.(출24:12) 그런데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는 언약의 돌 판이다.(신 9:9,11,15)

 

 

* 이스라엘 사람들이 법궤안의 돌 판을 볼 수 있었는가?

 

실제적으로 법궤 안에 있는 돌판(율법)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까이 접근 할 수도 없고, 들어 갈수도 없었고, 만질 수도 없었다. 즉 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것은 성문화된 다른 문서로 기록된 것들 뿐이고 그것을 제사장들이나 레위사람들이 해석해주고 적용 시켰다.

 

즉 법궤안의 두 돌 판은 상징물이다. 보관용인 것이다.

 

 

* 법궤안의 두 돌 판은 계약서이다.(언약서)

 

고대 시대에 계약이나 오늘날 계약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고대 시대에 두 사람, 또는 두 그룹이 계약을 할 때에 계약서를 주고받는다.

 

먼저는 계약의 내용이 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계약에 따른 법칙이 들어가고, 그 법칙을 준행 했을 때와 그 법칙을 어겼을 때의 상과 벌이 들어간다. 이것이 보편적이다. 나라를 세울 때에 법을 공포하는 것도 같은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알 것은 계약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데, 계약서를 한 장이 아닌, 두 장을 작성한다. 이 두 장에는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한다. 동일한 두 장의 계약서는 계약 당사자들( 두 그룹)이 한 장씩 나누어 갖게 되는 것이다.

 

자!! 법궤안의 두 돌 판은 돌에 세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서이다. 즉 두 돌 판에는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어 기록되어져 있다. (한 쪽에는 인륜계명, 다른 한 쪽에는 천륜계명이 기록된 것이 아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것이다.

 

이 계약서를 법궤 안에 두고, 하나님은 그 위에 임재 해 계시면서 그 계약을 하나님께서 시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역사하시는 근거는 바로 그 계약에 의해서 이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위반 할 때에 하나님은 그 계약대로 그들을 처분 하셨다.

 

 

* 계약의 기간은 얼마동안인가?

 

물론 돌에 새겼다는 것은 그 계약이 오래도록 지속 된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이러한 지속도 일년 단위로 제 계약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대 속죄일의 중요성이다. 대 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하루 지성소 안에 들어가 법궤 앞, 그리고 여호와 앞에 선다. 죄인들의 죄를 사함 받고,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서는 날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속죄의 제물은 드린다. 그런데 왜 일 년에 한번 온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그 일을 하는 것일까? 이거서은 하나님과의 계약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다시 계약 백성으로 서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그 날에만 대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로 법궤 앞,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법궤도,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 법궤는 땅에 속한 하나님의 나라백성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과 이 성전과 이 궤는 이방인들과는 관계없는 것들이다. 오직 유대인들만의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은 유대인들과만 관계했다. 이 계약 속에는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는 그 때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때 그 계약 안에서는 하나님도 내 하나님이 될 수 없다.

 

 

* 예수와 새 나라와 새 언약의 도래

 

오늘 우리는 예수를 통해 새로운 언약을 맺었다. 과거의 법궤 안에 든 것과는 다른 법을 가졌고, 과거에 땅에 있던 나라와는 다른 나라를 소유했다. 과거에 하나님은 지성소 안, 법궤위에 거해 계셨는데, 그분이 육신으로 찾아오셨고, 이제는 우리 안에 찾아오셨다.

 

이제 더 이상 법궤는 필요치 않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를 통한 더 나은 구원의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자녀 되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를 상속받는 그 언약을 예수의 피로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을 이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새기셨습니다.

 

(고후 3:3) 저럼 이제는 돌에 새긴 법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새긴 법으로 사는 것이다. 성령으로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이렇습니다.

 

과거에 제사장들이 성령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구별하려고 세마포 옷을 입혔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를 믿는 공동체(교회와 성도)를 제사장이라 부릅니다. 왜입니까? 성령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생명의 법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에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구원의 새 법, 영생하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새 법을 우리로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할 때에 오늘 우리는 하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공로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요 6:68절)의 베드로의 고백으로 살아야 한다. “주여 생명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의 고백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 완성의 때를 사는 신약의 백성

 

지금까지는 구약과 율법의 패함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말해서도 안 된다. 나에게 의미 없는 율법, 나에게 의미 없는 성전, 나에게 의미 없는 제사장, 나에게 의미 없는 구약의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 안에서 오늘 우리에게 그것들이 가진 의미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법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예수가 있고, 또한 성령의 강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율법의 완성에 대한 예 - 먼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으로 원리를 찾아보라.

 

음행에 대하여

 

구약의 경우에 음행으로 인정되는 것은 현장의 목격이다. 즉 눈으로 범죄를 봄으로 주어진 율법에 저촉됨을 확인해야만 범죄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문화된 법이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 마음속으로 음행을 품은 것 만으로도 법에 저촉 된다. 그 이유는 새 나라에서는 성문화된 법이 아니라 성령이 마음에 새긴 법이다. 때문에 사람들 눈에 드러나기 전에 이미 마음에 품을 때에 이미 법에 저촉되는 것이다.

 

때문에 구약의 율법이나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 했을 때에 구약에서는 간음의 행위만 하지 않으면, 즉 사람의 눈에 드러나는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않으면 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이것이 구약의 법이다. 그러나 신약의 법은 문서화 되지 않았다해도 그 법이 성령을 통해 마음에 새겨져 있어 생각만 하더라도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저촉 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하여

 

구약의 율법의 경우에는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에 기도 해야만 했다. 누군가 그 시간에 기도하지 않는다던지, 기도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다면 율법에 저촉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내가 누군가에게 드러내기 이전에 이미 기도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 판단하시는 분이(성령) 이미 판단하신다.

 

이는 금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더 이상 사람에게 판단 받는 그러한 법은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기도하는자인지 하지 않는 자인지는 성령에 의해서 판단 받는 것이다.

 

 

구제에 대하여

 

위와 같은 내용으로 해석하면 된다.

 

십계명에 대하여

 

천륜개명이라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여호와) 관계이다. 이법에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 형상을 만드는 것, 이것만 하지 않으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율법이 신약에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 이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다른 신을 품은 것만으로도 법에 저촉이 되는 때이다.

 

이것은 단순히 구약의 법이 강화되었다는 차원과는 다른 것이다. 왠지 새 법이 더 강화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멍애는 더 가벼운 것이다. 과거의 법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할 수 없는 가운데(성령이 없는) 율법의 멍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으로 이끌고 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가운데 이제는 스스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때이다. 인륜계명도 같은 방법으로 해석되고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법궤에 대하여

 

구약 신앙의 중심의 중심에 법궤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이다. 실상은 이방인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나와 하나님의 계약서는 예수이고, 또한 그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에 내 안에 새기시는 계약서이다. 과거처럼 눈에 보이는 계약서는 필요치 않는 것이다. 실상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어진 것이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계약서가 새겨진 것이다. 즉 오늘날 법궤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과거에 대 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하루 백성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가서 계약을 갱신했다면 오늘 우리는 단 하루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나 스스로가 직접 하나님의 계약을 바라보면서 갱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즉 내 안에 법궤가 있고, 두 돌판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자기 백성을 삼고, 그들과 계약한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아니다. 어찌보면 그런 의미로는 구약 성경 자체가 나와는 관계 없는 성경이다. 그들의 역사이고, 그들의 신앙이다. 그런 구약의 해석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쩐 의미로 다가오는가? 그리고 그 때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가?

 

구약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해석 되어야 하는가? 구약에 그렇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 구약에 그렇게 언약 하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언약을 맺으시고 이루시는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구약에 성전을 주어서 자기 백성을 만나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가? 구약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오늘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구원하시는가? 구약에 자기 백성과 동행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어떤 방식으로 동행하시는가?

 

이와 같은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구약의 완성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최승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