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는 잃은 양을 찾았노라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누가복음 15 : 1 - 7
독일에 히틀러가 전 세계를 전쟁터로 몰아가고 있을 때 본 헤퍼는 신학자요 설교가로서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미친 운전사가 만취한 상태로 차를 몰고 가면서 좌충우돌하여 많은 사람들을 치고 죽이고 있을 때 교회와 성도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다친 사람을 치료해주고, 죽은 사람을 장례식이나 치루고, 엎드려 기도만 하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그 미친 운전자를 끌어내려 더 이상 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되지 않습니까?’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 저 히틀러가 바로 미친 운전자입니다. 교회가 무력하게 골방에서 기도만 하고 있을게 아니라 히틀러를 죽여 더 이상의 많은 사람을 죽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 암살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비밀경찰에게 잡혀 1945년 4월 9일 젊은 39세의 나이로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처형당하기 며칠 전에 꿈속에서 히틀러가 죽어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히틀러에게 ‘너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으니 이제 그 죄 값을 지옥에 떨어져 받으라’고 하시는 것을 보고 본 헤퍼는 ‘저 녀석, 그러고도 싸지’, 그러고 있는데 히틀러가 벌떡 일어나면서 ‘하나님 억울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헤퍼는 ‘아니 저 놈이 도대체 뭐가 억울하다는 거냐’, 하며 쳐다 보고 있는데 히틀러가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요, 이렇게 천국이 있고 하나님이 계시고 또 지옥이 있다는 거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내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도 나에게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억울합니다’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고 꿈을 깼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본 헤퍼는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 이, 내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히틀러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라고 크게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책을 쓰서 세상에 내 놓은 것이 ‘본 헤퍼의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미친 운전자를 끌어내리는 것은 혁명신학입니다. 본 헤퍼가 미친 운전자를 끌어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히틀러를 죽이고자 암살단을 조직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부정한 사회를 바로 잡고 구조적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깬 본 헤퍼는 자신의 혁명신학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히틀러를 위해 기도하지 못했던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틀러에게도 천국과 지옥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복음신학의 이론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본 헤퍼가 쓴 옥중 서신은 기독교에 혁명신학과 복음신학과의 엄청난 문제가 되어 논란이 대단했습니다. 히틀러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혁명신학과, 히틀러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해야 한다는 복음신학으로 많은 토론을 하게 하였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 신학은 기독교 안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산에 모 교회에 부인이 교회 다니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고 애를 먹이던 남편이 병들어 죽어 장례 예배를 드릴 때 부인 집사에게 ‘남편이 돌아가셔서 매우 섭섭하지요’ 하며 위로를 하니까, 그 부인 집사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시원합니다. 이제 맘대로 교회 다닐 수 있어 좋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인 집사의 말을 듣고 매우 당황했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애를 먹였을지라도 그 영혼이 지옥 불에 던져졌다는 것을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남편에게 전도하지 못한 것을 조금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이 반대하고 많은 애를 먹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그 남편을 위해 복음을 전하지 못한 자신을 죄송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을 반대하던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 맘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어 좋다’고 하는 것은 ‘혁명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치고 복음전하고 기도하는 것은 ‘복음신학’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잃은 것을 찾는 비유를 계속해서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와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삼위가 함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는 성자 예수님이시고,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은 등불을 켜고 찾았다는 성령 하나님을 의미하며, 돌아온 탕자를 기뻐하는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로 모여 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고 하는 것을 알고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10).
오늘은 잃은 양을 찾은 목자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잃고 그 양을 찾기 위해 수고하다 양을 찾았을 때 즐거워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6)고 하며 잔치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었다는 것과 한 마리 양을 찾았다고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리를 찾았다고 여러 마리의 양을 잡아 잔치를 했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잃은 양에 대한 관심입니다. 한 마리를 잃었을 때 아흔 아홉 마리가 있다고 해서 그 한 마리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 보다 잃은 양 한 마리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잃은 한 마리를 찾으려다가 아흔 아홉 마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잃은 그 한 마리의 생명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매우 사랑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들에서 양을 많이 쳤습니다. 들에는 양의 우리가 없고 밤이 되면 목자가 있는 곳에 모여 자는 것입니다. 양들이 잠들었을 때 목자는 이리나 늑대가 양을 해치지 못하도록 깨어 지킵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를 따르고 목자는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낮에 흩어져 꼴을 뜯다가 해가 지면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 확인을 합니다. 그런데 한 마리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목자는 그 잃은 양 한 마리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시덤불에 걸려 피를 흘리며 울고 있지나 앓을까, 위험한 바위틈에 끼여 죽어가고 있지나 않을까, 사나운 늑대나 이리에게 잡혀 행여나 죽지나 않았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심히 괴로웠습니다. 잃은 양을 생각하며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잃고 찾아다니는 부모를 보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입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발 뻗고 편히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 못 받느냐’고 묻습니다. 지나가는 아이만 보아도 마치 자기 아이처럼 보여 뛰어가서 그 아이를 붙잡고 이름을 불러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누구의 잘못으로 양을 잃게 되었느냐? 책임소재입니다. 목자는 자신이 잘못해서 양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양이 목자를 잘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에게 잘못을 돌리지 않습니다. 목자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양을 잃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잃은 양에 대해 죄책을 느끼고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는 잃은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용서해다오 내가 잘못했다’고 하며 자신이 잘 돌보지 못해서 잃었다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잘 따르지 않고 한눈팔다가 부모를 잃게 된 것입니다. 아이의 잘못으로 부모를 잃었지만 그러나 부모는 그 아이의 잘못이라고 하지 않고 내가 잘 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것을 잘 못 느낍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있을 때 떠나는 그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잘못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그 사람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내가 잘못해서 그 사람이 떠났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난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떠난 것은 전적으로 교회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떠나는 그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 책임을 교회가 지고 찾아야합니다. 찾을 때까지, 돌아올 때까지 교회가 찾아야 합니다.
목자는 자신이 잘못해서 양을 잃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잃은 양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게 될 뿐 아니라 잃은 양이 어디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가를 생각할 때 서둘러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나서는 것입니다. 양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피지 못해서 양을 잃게 되었다는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다가 못찾았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녔다’(4)고 하였습니다. ‘찾아내기까지’란 순교적인 사명감을 말해줍니다. 어느 정도 찾다가 찾지 못했을 때 안타깝지만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노력으로 찾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잃은 양이 스스로 찾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돌아오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는 합니다. 그러나 찾기까지 결사적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에 대한 그림을 보면 벼랑 끝 가시덤불에 결려 울고 있는 양을 목자가 엎드려 겨우 손을 펴서 잡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잃은 양의 위태로움을 잘 나타내 주는 그림입니다. 길 잃은 양은 매우 위험한 곳에, 낭떨어지 벼랑 끝에 가시덤불에 걸려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난 영혼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관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사탄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것 입니다. 그냥 기도만 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기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히 찾지 않으면 지옥불 속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위험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았습니다. 양을 찾았을 때 양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네가 잘못했다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를 따르지 않았느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마치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속죄 받은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죄를 용서 받은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벗들과 이웃을 불러 모아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양 한 마리의 가치가 얼마냐? 경제적 가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양 한 마리 보다 더 많은 양을 잡아 잔치를 하였지만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잃었다가 찾은 양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잃었다가 찾았을 때 그 기쁨을 잘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7)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만큼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을 더 이상 구원 받을 수 없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나의 잃은 양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달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돌로 쳐 죽이는 자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크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죽었습니다(행7:60).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을 따라 다니며 방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골육 친척을 위해 마음에 크게 고통을 느끼기까지 하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롬9:1).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박해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 복음을 전하여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교회를 반대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가 빨리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잃은 양이라고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여 속히 돌아오게 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잃었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잃은 양을 찾아야 합니다. 기도만으로 잃은 양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가시덤불에 걸려 피를 흘리고 두려움에 울고 있는 잃은 양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사단에 매여 지옥으로 던져질 위기에 빠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합니다.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며 영광 돌리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