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음성 듣기
정원
나는 20 여년 전부터 주님의 음성을 듣고 훈련해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경험해왔다.
나는 노트에 하루 종일 빽빽하게 주의 음성을 적었다.
초기에 주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일일이 오늘은 누가 찾아온다. 너는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라.. 등등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기도 모임을 인도할 때도 항상 "주님이 이것을 원하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했고 예언을 받은 이들은 나를 선지자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남들처럼 그 음성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고 몰랐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초보적인 상태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참 많이 겪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그 음성을 항상 듣지 않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다시 가까이 가기도 했다.
주님의 음성에 대한 오해와 무지는 너무 심각해서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려면 책 한권 분량이 필요하다. 다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주님의 음성은 다양한 기능으로 다양하게 임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하나도 특별하고 신령한 것이 아니다.
자녀가 부모와 대화하는 것이 신령하다면 이는 이상한 일이다.
다만 그 음성의 수준과 차원은 달란트, 사명을 따라 기질을 따라 다양하게 차이가 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남의 듣는 음성과 자신이 듣는 음성은 다르며 그것을 비교 분석하여 누구는 옳고 나는 틀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음성의 내용 중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선지자적인 음성을 듣는 이도 있고 기도와 중보에 대한 정보와 음성을 듣는 이도 있다.
나라와 민족의 앞날과 방향에 대하여 듣는 이도 있다.
가르침과 진리에 대하여 듣는 이도 있다.
구체적인 비밀에 대하여 듣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보편적이 아니다.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음성은 자신에 대한 깨달음이고 보혜사로서 위로자로서의 음성이다.
주님의 사랑과 임재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지혜의 깨달음으로서의 음성이다.
그것은 보편적이며 누구나 듣는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의 고통과 문제에 대하여 주님께 물을 때에 주님은 대답하시며
그렇게 성도가 묻는 것을 주님은 아주 기뻐하신다.
사실 성도들이 기도를 드릴 때에 주님은 대답을 하시려고 준비하시는데 막상 성도들은 들을 준비를 하지 않고 혼자 울고 떠들다 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얼마나 주님을 서운하게 하는지!
나는 기도 중에 사람들이 혼자 엎드려 울고 주님이 그 뒤에 서서 안타까와하시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가 무엇이든 결코 주님께 등을 돌리고 기도해서는 안된다.
주님은 항상 그의 백성들에게 사랑과 지혜의 빛을 보내신다.
그분은 우리가 낙심하고 떨어지려고 할 때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흑암으로 떨어지는 우리를 붙잡으신다.
그 지혜와 사랑으로 깨달음때문에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영이 아니면 우리는 단 1초도 주님을 생각할수도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이 항상 우리를 두르는데 우리는 별로 은혜받은 것이 없고 깨달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주님을 슬프게 만든다.
주님의 음성에 대하여 한가지더..그것은 그 음성을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음성을 듣고 대화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날마다 수시로
잠이 들기 전에
힘들 때 기쁠 때
어디서나 주님과 대화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님의 음성이 임한다.
갑자기 주님의 음성이 강하게 온다.
마치 다메섹에서 바울에게 임하신 주님처럼 강력하게 온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초보적인 상태이며 특별한 상태이고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러한 체험을 기다린다.
그리고 자신이 듣는 음성은 그렇게 신비하지 않으며
자신이 들을려고 할 때만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무지이다.
설명해보자.
이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이가 시험공부를 하나도 안 했는데
갑자기 시험 전날에 시험지를 주님이 보여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100점을 맞았다고 했다.
물론 주님이 그러실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은 시험지를 주님이 보여주시지 않더라도 열심히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
이런 간증을 들은 적도 있다.
어떤 이가 어떤 면허시험을 보는데 자신이 전혀 모르는 문제들 뿐이라 기가 막혀서
답을 쓰지 않고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임하셨다.
그러더니 몸이 저절로 일어나 지더더 손가락이 스스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펜을 잡고 스르륵 정답을 쓰더란다.
물론 그래서 합격을 했다.
주님이 그러실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주님이 갑자기 기적적으로 어떤 이에게 임해서 손가락이 움직여지며 피아노를 잘 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아노를 잘 치고 싶으면 그것을 많이 연습해야 한다.
갑자기 어떤 이는 방언이 나왔는데 영어 방언이 나왔고 그래서 영어를 다 알아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주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하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한다.
어떤 이는 저절로 방언이 터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방언을 훈련하며 입술을 주께 맡기고 시도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강권적으로 예언이 임한다. 그것은 구약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언을 하려고 하고 통역을 하려고 하고
마음을 생각과 입술을 주께 맡기며 믿음으로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했다.
수준과 차원이 있다는 말이다.
기억하라.
주님은 강권적으로 사람의 의지를 거스리고 일시적으로 역사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주님과 동업해야 한다.
스스로 주님이 자신을 사용하시도록 연습하고 훈련하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이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그저 저절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면 안된다.
솔로몬은 그저 순간에 지혜를 받은 줄로 알지만 외경의 집회서나 지혜서를 보면 이 사람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생명을 경주했는지 알 수 있다.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음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구체적으로 훈련하고 성실하게 붙잡는 이들은 많지 않다.
나는 오래전에 아주 구체적으로 주님의 음성과 예언과 환상과 많은 것들을 체험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그 은혜를 계속 꾸준히 유지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다 한때 뿐이었다.
한 때 그들은 강력한 은혜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을 계속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삼아
꾸준하게 주님과 교제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모두들 부러워하고 높이 보았으나 나중에 영이 엉망으로 되는 경우를 나는 참 많이 보고 들었다.
그러므로 강렬하고 화려한 체험보다 날마다 일상의 주님 그분과 꾸준하게 대화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그것은 신비한 것도 아니고 신령한 것도 아니며 그저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음성을 좇다보면 분명한 것은 삶과 인격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전에는 괴로웠던 것들이 이상하게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되며
주님 사모함과 영혼에 대한 사랑의 증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정죄감들..
그런 것들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 음성은 누구나에게 있는 것이므로 신령한 선지자인척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악한 영들이 방문해서 속인다.
나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신령하고 깊은 주님의 은혜는 어떤 특별한 몇몇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원하고 추구하며 사모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다.
주님의 음성과 경험은 특별한 소수의 몇 사람만이 경험해서 모든 이들이 선택받은 그들을 부러워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주 열등생이었다.
주님 체험에 있어서 나처럼 늦고 잘 안되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나처럼 많이 훈련하고 추구한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경험하게 되었다.
모두들 쉽게 경험하는 것을 나는 아무리 해도 잘 안되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이 나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명과 체질의 차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강렬하게 주님을 경험하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잘 유지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않는다.
너무 쉽게 주님을 경험하는 이들은 그 가치를 잘 못느끼고 감격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10년 이상을 기다리고 사모하였고 군대에서 탈영을 해서 목숨을 걸고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생명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원리는 분명하다. 계속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님의 임재와 음성을 구하는 이는
반드시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며 한걸음씩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를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다.
주님께서 나같이 둔한 사람에게 그 영성을 사모하게 하신 것은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을 경험하면 세상에 못 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의 사명도 간단하다.
주님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쉽게 주님을 경험하고 누리고 변화되는 것을 원한다.
그래서 그것을 돕고 싶은 것이다.
어떤 이가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며 자신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놀라운 것을 깨달았는지
그것을 많이 전하면 듣고 보는 자들이 그를 부러워하기만 할 뿐 그리고 그 수준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기만 할 뿐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그러나 은혜의 경험에 아주 열등생이었던 어떤 이가 누구나 먹고 알아듣고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으로 주님의 은혜에 쉽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운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도구가 되기를 원한다.
II.
나에게 너무나 많은 영혼의 밤 고통의 눈물이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쉽게 주님을 경험하면 거의 미칠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주님을 사모하는 듯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환상과 음성과 여러 체험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내게는 많은 사모함이 있었다.
성경은 많이 읽었고 외우고 각종 줄을 치고 주석을 보고 해설서를 보고
도서관에서 온갖 설교의 귀재다 뭐다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읽었던 주석이다..
그러한 평판이 있는 책들을 많이 보았지만 내 심령에 감동이 없었다.
나의 성경은 수 많은 줄과 연필 자국, 기도와 낙서로 마치 걸레와도 같았다.
내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청년 시절 교회에서 성경퀴즈 대회가 있으면 국립 중앙 도서관에 가서 그 성경본문에 관한 모든 주석과 자료를 다 뒤져서 공부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했다.
나는 많은 집회에 가서 모두가 은혜받는데 오직 나 혼자만이 맹숭맹숭하여 버림받은 서글픔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수 없이 셀 수 없는 밤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주님을 체험하게 될꺼야.. 주님이 만나주실거야.. 그렇게 기대하고 갔던 집회..
그리고 돌아올 때는 그저 죽고 싶었던 수 많은 날 들이 있었다.
금식도 많이 하고 회개도 많이 하고 내가 워낙 더럽고 악해서 그렇다 생각하고 온갖 회개도.. 그러나 내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화가 나면 일부러 삐뚜러진 짓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다시 곤고해지면 회개하고..
그러나 그 악순환은 너무나 오랜 세월 반복되었다. 그것은 몇 년 동안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에게 주님은 쉽게 임하시고 만나주시고 역사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내가 그분을 더듬어 찾는 것을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영성의 원리에 대하여 조금 알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
그것은 내가 쉽게 주님을 경험했으면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수 많은 노력과 방법과 추구와 그 몸부림이 필요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것 저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은 내게 간절함을 주셨다. 그러나 그 간절함을 채워주시지는 않으셨다.
나는 마치 주님이 나를 약을 올리시는 것 같았다.
주님은 내가 오랫동안 그분을 찾게 하셨고 그분이 직접 모든 것을 알려 주시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찾아가며 발견하시도록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20여년 전 어느 날 예수 전도단 초기에 명동의 YWCA에서 집회를 할 때 갔었다.
당시에는 거의 매주 화요일 마다 갔었다.
어느 집회에서 사람들이 다들 나와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간증을 했다.
그런데 부러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
집회가 끝나고 명동의 길을 걸어가는데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고 아픈지
그냥 땅바닥에 엎어져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 때 내 앞에 어떤 자매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매가 조금 전의 집회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았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와 음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주님의 음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솔깃해서 좀 더 듣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좀 길다고 하면서 괜찮느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주님을 더 알고 은혜를 맛보고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지구끝까지도 갈 수 있으며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에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참 놀랍다고 했다.
그러한 간절함.. 그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주님이 채워주시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100%만족이 아니고 감질날 정도로 만나주셨다.
그러니 조금 알아갈수록 더 알고 싶어 더 사모하게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형제에게 사역을 시키기 전에 그의 간절함을 시험하였다고 하였다.
간절함.. 그것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학위나 성품이나 재능이나 그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주님의 일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가..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 된다.
그 간절함이 없이 주님을 쉽게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보면 그들은 계속 주님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쉽게 얻어서 그 가치를 모르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체로 잘 인내하지 못하며 당장에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면 마치 죽을 것처럼 난리를 친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은 응답을 받아보았자 며칠이 안가서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간절함이 결여된 상태에서 주님이 임하시는 것은 그리 깊을 수가 없다.
나는 간절함 속에서 구하고 또 구하고.. 그러다가 방언을 받고.. 마치 하늘에 올라간 것 같았다.
방언을 입으로 소리내서 했지만 아무 느낌도 감동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주님이 나같은 이에게도 임하신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에
하루에 열 서너 시간씩 방언을 했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꿈에서도 방언을 했다.
그렇게 몇 달 하니까 기쁨도 오고 방언의 뜻도 알게 되었다.
밤 열시에 방언을 시작해서 정신을 차리면 새벽 여섯시.. 그렇게 방언을 했다.
내게는 은사가 워낙 늦게 임하고 잘 오지 않기 때문에 일단 한번 받으면 그것이 날아갈까 걱정되어서 아침에 깨면 이 보석이 여전히 내게 있는지 궁금했고 그래서 라라라라... 하다가 방언이 잘 나오면 아.. 내 방언 무사하구나.. 하고 좋아했다.
나는 입으로만 사모한다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사모가 아니다.
정말 사모한다면 그 무엇이든 대가를 지불할 수가 있는가?
오직 주님을 알기 원한다면 모든 이들에게 또라이 소리 들으면서 그렇게 주님께 미쳐갈 수 있는가?
온 몸과 마음과 생각과 뇌리 속에 주님을 붙들기 원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웅변하지 않더라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 전과 비교하면 지금 나는 어떤가
이제 주님이 역사하시는 원리들을 많이 이해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비통함은 별로 없다.
그러나 주님 그 분에 대한 사모함은 여전하고 또 여전하다.
오직 내 살아존재하는 이유도 그분을 더 알기 위한 것이다.
주의 음성을 듣고 무를을 꿇고 엎드리고 주를 부르면 주의 뜻을 구하는 것
그보다 놀라운 행복을 나는 우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쉽게 주님을 경험한다.
그들은 일상의 여러 어려움에 흔들리지 말고 꾸준하게 주님을 붙드는 훈련을 해야한다.
어떤 이들은 주님 경험이 어렵다.
그들은 낙심하지 말고 감사하며 한걸음씩 주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에 대한 간절함과 꾸준함
이 두가지는 정말 너무나도 귀한 것이다.
나는 주님을 향해서 간절함과 꾸준함 이 두가지를 꼭 붙들고 있는 이들은 너무나 복받은 자들이며 영원한 곳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며 주님과 가까이 영원토록 교제하며 살 것을 믿는다.
주님은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목표이고 모든 것이시다.
그 분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구하고 또 구하고 붙잡아라.
그러한 자는 이 세상에도 오는 세상에도 가장 행복한 자가 될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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