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열매는 좋은 열매인가? 마 7:15-23 /하원식 목사
가을에 접어들면서 그렇게 무덥던 날씨도 이제 아침저녁으로 찬 기온이 피부로 느껴진다.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다. 가을은 ‘드러냄’의 계절이다. 가을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들어내는 계절이다. 겉보기에는 분별이 안 되던 나무들이 그 열매를 보면 그 정체가 분명하게 들어 나는 계절이다.
또 가을은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다. 저는 단풍보다 떨어지는 낙엽을 더 아름답게 본다. ‘내려놓음’ 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단풍이 들고 다음으로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이유는 나무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작업이라고 한다. 그렇게도 무성한 잎으로 ‘탄소동화작용’을 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일하던 나무 잎들이 겨울을 지내기 위하여 스스로를 내려놓는다. 낙엽이 되어 길가에 흩어져있는 낙엽을 보면 그 거룩한 ‘내려놓음’앞에 고개를 떨구며 낙엽을 밟기가 부끄러워서 이리 저리 낙엽을 피해 걸음을 옮긴다.
거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끝물의 과일 위에서 있는 대로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9월의 햇살을 몹시 사랑한다. 맑고 뜨거운 햇살이 어느 때보다 감사하게 느껴지는 날들이다. 들녘의 곡식들이 탱탱하게 여물어 가는 소리, 단맛이 무르익는 과일의 향기가 바람결에 묻어온다. ‘이틀만 더 남녘의 햇빛을 달라'고 기도하는 시인 릴케의 음성이, 농부들의 애타는 기도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하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열매 이야기를 하신다. 이 가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저와 여러분은‘가을에’ 부끄럽지 않는 신앙 인이 되자. 농부는 열매를 거두는 기쁨으로 산다. 봄에 씨를 뿌리고 알알이 익은 것을 창고에 거두는 기쁨은 농부만이 맛볼 수 있는 신비한 은혜다. 열매는 주인이 정성스럽게 거두어들인다. 그래서 열매는 주인의 창고에 들어간다. 열매는 씨가 있기에 생명이 있다.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계절이다. 열매라고 해서 다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알곡은 모아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게 된다. 낙엽도 불태우고 쭉정이도 불태워지고 오직 알알이 익은 곡식만이 창고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심지도 않고 많은 것을 거두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는 진리는 알면서도 심은 것과는 상관없이 많이 거두려고만 한다.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돈, 사업, 권세, 건강, 능력이 잎처럼 무성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낙엽처럼 떨어지게 되는 날 모든 것이 허무할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고 하였다. 좋은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란다.
1.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 마태복음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열매로 승부하라는 말씀이다. 참과 거짓을 구별하여 진리 편에 서고, 주님 편에 서라는 것이다. 어느 담벼락에 잎이 무성한 나무가 있었다. 저는 그 나무의 정체가 궁금했다. 가을이 되어도 잎만 푸를 뿐 도무지 이 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봄이 되어서야 저는 그 나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 나무는 개나리였다. 우리는 개나리의 노란 꽃만 늘상 보았기 때문에 꽃이 진 후의 나무의 정체를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나무라도 그 정체가 밝혀지는 날이 있다.
배추씨와 무씨도 씨앗 상태에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다 자란 연후에는 그 씨앗이 무슨 씨앗이었는지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 숨겨진 것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포도나무, 가시나무, 무화과나무, 엉겅퀴가 섞여 자라 처음에는 잘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열매를 보면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끝까지 긴장할 것을 요구하신다. 네가 포도나무인지 가시나무인지, 네가 무화과나무인지 엉겅퀴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나는 알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쭉정이로 판단되면 큰일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기다리신다. 열매로 알 수 있다. 씨앗과 열매는 언제나 같다. 하나의 씨앗은 열매로 맺히고, 열매는 결국 종자가 된다. 그러므로 씨앗과 열매는 양적으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는 같으며, 시간과 장소는 달라도 본질은 같다. 하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신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나무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 나무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원하신다. 좋은 나무가 되시기를 바란다. 그 열매 이상의 나무가 될 수 없다. 그 열매는 나무의 가치요, 생명이요, 본질이다. 그 나무와 다른 열매를 기다리는 것은 위선이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자연은 진실하다.
심은 대로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심지 않고 거두려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콩을 심었으면 콩을 거두고, 보리를 심었으면 보리를 거두게 된다. 좋은 씨앗을 심었으면 좋은 열매로 결실할 것이요, 나쁜 씨앗을 심었으면 나쁜 열매로 결실을 맺는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은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거두려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것을 거두고 좋은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좋은 씨앗을 심도록 해야 한다.
마음 밭에 욕심이라는 씨를 뿌리면 죄를 낳고, 결국 죽음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된다. 미움을 심으면 미움을 낳고, 살인을 거두게 된다. 탐심을 심으면 도적질을 거두고, 사람을 죽이게 된다. 거짓을 심으면 거짓을 거두고, 결국 망하게 된다. 성경에 보면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삭을 속였다. 그런데 나중에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고통스럽게 한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 동생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버리고, 요셉이 죽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 아버지 야곱을 수 십년 간 속였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우리의 주인되신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말씀한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한다. 우리가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열매를 맺을 때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겠다는 그런 내용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택하신 이유도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던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를 택한 이유가 열매를 많이 맺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응답 받기를 원하셔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으로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는 것은 존재 가치를 상실했다는 말이다. 자기의 본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주인에게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기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는 데 열매가 없다는 것이 이 무화과나무처럼 책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세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1:19 이하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는 데 예수님은 대단히 시장하셨다. 왜? 밤새도록 말씀 전하고 사람들을 상대했기 때문에 굉장히 시장했어요. 그래서 아침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무화과나무 하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큰 기대를 가지시고 그 무화과나무를 찾아 보셨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무화과 나무는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예요.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그랬다. 여러분 주님의 책망은 무섭다. 곧 말랐어요. 열매 없는 나무는 징벌을 받는 정도가 아니고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물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열매를 맺기까지 때를 기다려야 한다. 외로울 때도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의 살아있는 생애 속에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좋은 열매를 드리자.
16-20절 가시나무 중에서 갈매나무는 포도나무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또 엉겅퀴나무도 멀리서 보면 무화과로 착각할 만큼 거의 비슷하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 감나무와 고염나무다. 감나무와 고염나무는 거의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열매는 맺으면 확연히 구분이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겠느냐? 또 엉겅퀴나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말씀하시며 외형으로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아도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열매를 통해서 그 나무를 알 수가 있고 맺히는 열매의 상태를 보아서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나무를 보아서는 좋은 나무인지, 못된 나무인지 통 분간이 안 간다. 그러나 나중에 그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게 된다고 하신다. 열매는 ‘결과’ 를 말하는 것이다. 열매는 ‘마지막’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장차 인간을 심판하실 때, 열매를 보시고 심판하실 것임이 분명하다. 열매를 보면 우리가 좋은 사람인지, 못된 사람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좋은 열매 맺기를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면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는 거짓으로 꾸민 외식이 판을 친다. 하나님 앞에서만은 가식과 외식을 벗어야만 한다. 하나님 앞에 겉으로 보이는 외식을 벗어야 결국 아름다운 속이 드러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2. 열매로 승부하라는 뜻은 무엇인가?
1) 예수님 편에 서야한다. 요한복음15:5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열매 맺는 확실한 비결은 하나!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확실히 예수님 편에 서야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창조주이시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예수님께 용서와 구원이 있다. 은혜가 있다. 축복이 있다. 매일 매사 매 순간 주님 편에 서십시오. 시편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우편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심으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어느 분이 천국에 갔더란다. 이분은 집사님이었다. 천국에 가니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잘 왔다고 환영하더란다. 그런데 보니 저 멀리서 목사님 한 분이 천국 문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목사님을 보시더니 예수님이 보좌를 박차고 뛰어나가 그 목사님을 환영했다. 이 모습을 보고 이 집사님이 좀 화가 났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의했다. “아니 목사는 주의 종이라고 세상에 살면서 대우받았는데 천국에서도 이렇게 대우 받아야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러더랍니다. “아니다. 목사가 천국에 오는게 하도 오랜만이라서 내가 이렇게 환영한 것이란다.” 우스개 소리지만 정말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는가?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날에 자기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무엇인가? 23절이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과거형이다. 지금이 아니라 나는 과거로부터도 너희를 몰랐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도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80년대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들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증가세가 멈추더니, 급기야는 감소 추세로 돌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부랴부랴 한국교회 침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진단하느라 분주하다. 종교사회학자들은 물질적인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사람들의 관심은 종교에서 레저로 넘어간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감소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요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뿐일까요? 그렇지 않다.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존경은 커녕 조롱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우리의 모습이 처량하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이고 편협한 신앙에 대해서 지적한다. 초월성의 빛으로 세상을 조명해야 할 교회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투항해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보다는 안정적 물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소리를 대변한다는 말일 것이다. 교권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습도 가관이다. 우리의 유일한 자원인 도덕적인, 영적인 자산을 다 까먹은 후에 남는 것은 세상의 비난이다. 이런 비난은 아프지만 달게 받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처럼 영이 혼돈된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영적 분별력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한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막13:22).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대개 가시적인 결과다. 목회자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교인수가 늘어나고 경상비가 늘어나면 그는 능력 있는 목사로 인정을 받는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런 시선이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 목사들은 강박관념처럼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에 전념한다. 복음의 본질을 굳게 붙잡기보다는 방법에 집착한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돌봄은 사라진다. 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교우들 속에 자라나는 것이다.
3, 좋은 열매는 좋은 씨에 있다. 우리는 선한 열매 맺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안 된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18,24). 이 말은 비참한 인간 실존의 절규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평생동안 원하는 착한 일은 못하고 원치 않는 악한 짓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왜 그런가? 이는 분명히 못된 종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누가 이 종자를 바꾸어 줄꼬? 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종자를 바꾸지 않는 한 좋은 나무는 될 수 없다. 나무를 탓하면서 가지를 잘라 버려도 헛수고다. 열매를 탓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까요?
1) 좋은 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야 한다. (마 7:16-18)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포도나무에서 포도를, 감나무에서 감이 열린다. 이처럼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 그러므로 나쁜 열매가 맺혀지고 있다면 열매만 바꾸려 하지말고 혹시 나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만이 가장 좋은 나무이신데 예수님께 잘 붙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담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육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으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 나무에 접붙여 있어야 한다.
2) 나쁜 가지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가지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인간의 사상이나 생각들을 쳐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5장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좋지 않는 가지 쓸모없는 가지는 잘 쳐준다. 좋지 않는 가지란 나의 생각을 의미한다. 아무리 좋은 진액을 받아도 가지를 쳐 주지 않으면 충실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생각이 바뀌지 않고 있으면 답답할 일이다. 거지를 왕자 삼았더니 왕자가 거지 사고로만 산다면 답답할 일 아닌가?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제자리에 돌아와 버린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릴 수 없다. 불 신앙의 생각, 부정적인 생각, 패배적인 생각, 세속적인 생각, 악하고 거짓된 생각, 고정관념, 편견을 제거해야 한다. 염려, 걱정, 근심 등 버려야 한다. 생각이 바꾸어져야 하나님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신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 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보면 열매 맺는 참 원리를 알 수 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나무는 가시나무인데 거기서 포도를 따겠다고 말하면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나무는 엉겅퀴나무인데 거기에서 무화과를 따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망상이고 도둑놈의 심보다. 믿음은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포도를 따기 위해 좋은 포도나무가 되도록 힘을 쓰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에서 좋은 열매를 강조하시지만 더 강조하시는 것은 좋은 나무가 되라는 것이다. ‘가시 나무와 엉겅퀴나무’ 인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일에 급급해 하지말고 자신을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로 바꾸라는 것이다. 열매가 행동이라면 나무는 인격과 성품이다.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예수님 안에서 변하지 않으면 좋은 언행을 기대할 수 없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성품이 좋은 나무로 변화할 때 그 곳에 좋은 열매들이 맺혀지게 된다. 좋은 나무가 되는 과정이 바로 경건의 훈련이다.
믿음은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좋은 열매다. 예수님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좋은 나무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열매 맺는 참 원리를 알 수 있다. 먼저, 무작정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나무는 가시나무인데 열매는 포도를 따겠다니 말이 되는가? 나무는 엉겅퀴 나무인데 열매는 무화과를 따겠다는 이 심보는 무엇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부터 말씀하시지 않는다. 나무를 먼저 말씀하신다. <열매>가 그 사람의≪행위≫라면 <나무>는 그 사람의 됨됨이, 즉 ≪인격과 성품과 기질≫을 말한다. 깊이 생각해 볼 교훈이 있다. 예수님은 행동부터 바꾸려고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속 사람이 변하면 행동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행동>을 고치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사람>이 먼저 바뀌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얻게 된다. <인격>이 문제라는 말씀이다. 속 사람은 여전하면서 행동만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건 가식이다. 절대로 오래가지 못 한다. <탐스러운 포도열매>를 그럴싸하게 내보이면서 <가시나무 됨>을 숨기려 하지말고 열매 이전에 나를 <포도나무>로 바꾸라는 것이다. <화려하고 예쁜 무화과>를 보이면서 <엉겅퀴>인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들지 말고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무화과나무>로 바꾸라는 것이다. 맺힌 그 열매가 과연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을 가다듬자. 이것으로는 안 된다. 환경이나 분위기를 탓할 것도 없다. 환경과 조건은 때로 빠르게 하고, 느리게 하며 많게 하기도하고 적게 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씨를 바꾸거나 나무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햇빛이 콩 나무를 팥 나무로 바꾸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바람이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바꾸어 놓지는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나무가 되지는 못하고 아름다운 열매만을 구하고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 겉으로는 너무 많은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우리는 간혹 수많은 곁가지와 작고 부실한 열매들을 신앙의 결실이요, 혜택이라고 착각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가? 먼저 좋은 씨앗과 좋은 나무가 되시기 바란다. 그러고야 아름다운 열매가 있을 것이다.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얻고,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얻는 이 진리를 따라 <좋은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란다.
완성은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이지 얼마를 소유했느냐에 있는 게 아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라.' 얼마나 평범하고 엄연한 진리인가? '진실해야 한다.' 그래야 진실의 열매가 있다. 자, 보세요. 마음은 씨앗이다. 말은 열매다. 뜻은 나무요, 행위는 열매다. 인격은 나무요, 공인된 것이나 평판은 그 열매다. 나쁜 열매를 맺었으면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우연은 없다. 환경이나 분위기를 탓하지 말자. 이것은 성경을 거스르는 것이다.
세상을 원망할 것 없다. 환경과 조건은 양의 문제이지 근본적인 씨를 바꾸지는 못 한다. 물론 바꾸어지지도 않는다. 여러분, 비바람이 치고, 가뭄이 들고, 장마가 지고, 근본적으로 거름이 잘못되고, 또 어떻게 됐다고 해서 콩이 팥으로 되는 것을 봤는가? 콩은 콩이다. 많이 맺고 적게 맺는 것은 별문제다. 콩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환경이 씨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렇다. 이것이 오늘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주는 교훈이다. 굳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고 몸부림치지 안아도 된다. 좋은 나무만 되면 언제라도 좋은 열매는 맺게 되어 있고, 또 그럴 기회는 오는 것이다.
아주 오래 된 이야기이지만 1919년에 파리에서[파리 평화 회의]가 개최될 무렵 몇 명의 아랍 지도자들이 회의에 초청되었다. 그들은 파리에 있는 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는데, 욕실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쉴 새 없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아랍 국가들은 기름은 많지만 물은 귀한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들에게 이 수도 꼭지는 희한한 것이었다. 그런데 회의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아랍 지도자들이 욕실에 붙어 있는 수도꼭지를 떼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 생각에는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물이 나오는 요술 기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려면 물의 근원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거저 꼭지에서만 물이 나오는 줄로 알았고 그 수도꼭지를 가지고 가려고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열매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가시나무와 같고 엉겅퀴와 같이 살면서도 필요 할 때마다 늘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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