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 말 1:13, 2:8~10,
서신 / 살전 2:7하~9, 13,
복음 / 마 23:1~12
어떤 선교사님이 원주민들에게 성경을 순서대로 가르쳐 주다가 아주 곤혹스런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그대로 실천하자니 자신 없고 그냥 넘어가자니 꺼림칙한 구절은 누가복음 6장 10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였습니다. 성경은 만민을 위한 것이고 특히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구절은 우선 특정인을 대상으로 합니다. 오늘 성경 절과 본문은 주님의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해석하여 증거하는 목회자에게는 피하고 싶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지피지기이면 백전불태라. 너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통해 목회자는 제 본분을 알아 신실하게 행하고 성도는 목회자의 약함을 알아 기도하며 협력한다면 도우시는 성령님 안에서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고 반드시 승리하는 주님의 교회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먼저 구약 본문은 구주 예수님 탄생 전 5세기 말라기 예언자 당시의 사제들이 탐욕 정신으로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바치고 모세의 율법 자체를 왜곡하여 사람들에게 편파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 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말 1:13, 2:8~9)."
그런데 그 잘못은 "우리의 조상은 한 분이 아니시냐? 우리를 내신 하나님도 한 분이 아니시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 배신하여, 우리 조상이 맺은 계약을 깨뜨리느냐? (10절)" 말씀과 같이 한 분이신 하나님을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하신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와 현대 교회를 향해 필요한 제도들을 존중하지 않고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때에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가 박원순 후보를 마귀 새끼라 하며 그가 서울시장 되면 큰일 난다고 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욕을 먹은 것이 그 사례라 하겠습니다.
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 바르게 살 것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인데 구약의 말씀보다 더 날카롭고 냉혹합니다. 특히 본문에 이어지는 일곱 가지 재앙 대목에서 그렇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마 23:13, 33)"
1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와 같이 주님의 말씀은 일단 당신의 제자들 곧, 교회의 지도자들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긴 하지만 또한 교회 공동체 자체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에 물들지 않도록 하려 당신을 따르는 무리, 즉 교인들에게 주는 충고를 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위선이야말로 주님의 교회를 거짓되게 하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위대한 입법자, 우리로 하면 나라의 기본법인 헌법을 만든 사람 모세를 통해 받고 전해진 율법과 거기서 발전된 전승을 보존하고 선포하는 것이 그들의 영광스런 책무였습니다. 그런데 왜 저들이 주님의 꾸중을 들었을까요?
우리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실은 먼저 말만 하고 실천이 없었습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4절)." 그들은 노새와 낙타의 등에 엄청난 짐을 실어 놓고, 그 짐을 옮기는 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장사꾼과 같이 정결례, 안식일, 금식과 기도 등에 관해 무려 613가지 조항의 율법을 만들어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경건한 이스라엘 서민들에게 지키도록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서민들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고 막상 자기들은 그 짐을 가볍게 할 방법을 찾아내고 있었으니 그들의 첫째 죄는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5절)." 주님의 말씀 중 '경문'이란 신명기 6장 "하나님을 경외하여 섬기라"는 글귀를 양피지에 써서 넣고 손목에 매는 조그만 갑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 실천하게 하는 것이 경문을 차는 본뜻인데도 헬라어 경문이란 단어가 망보다, 지킨다는 데서 온 말로 '보호해 주는 것', '액막이'고 그 경문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 술을 길게 만들어 달았으니 저들에게는 속보다 겉이, 내용물보다 그릇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드러내 보이려 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6절)'를 좋아했습니다. 자리는 나이에 따라 앉게 정해지거나 책임의 비중에 따라 질서를 잡으려는 방편으로 정해졌습니다. 우리가 잔치에 가는 것은 나를 뽐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잔치 주인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임을 기억한다면 자신의 허영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명예심을 만족하게 하려고 하는 윗자리 다툼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7절)." 이스라엘 말로 '라브'는 스승, '라삐'는 나의 스승, '랏방'은 우리의 스승입니다. 인사를 받는 사람 편에서 보면 인사하는 사람은 '나의 제자'입니다. 사람들은 '내 제자'라는 말을 쓰기 좋아합니다. 즉 제자라는 말을 통해 자신이 스승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내 제자라고 하여 내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요, 인생에는 그가 나의 스승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8절)"고 말씀하십니다. 선생을 선생으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호칭을 좋아하고 그것만을 노리는 명예심과 오만을 멀리하고 끊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8하)"는 말씀은 조금만 잘나가면 막말하고, 반발하고, 목에 힘주는 사람들, 그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려라, 특히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겸손해지라는 말씀입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9절)."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아버지는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세 조상에게만 사용되었고, 어머니는 사라와 리브가 레아와 라헬에게만 붙였던 호칭입니다. 그 후 '아브', '앗바'(아버지)를 유명한 사람이나 학자에게 붙였습니다. 라삐 이스마엘과 라삐 아키바는 세상의 아버지라 존경을 받고, 그렇게 불렸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밑에서는 모두가 형제이고 제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선생이나 아버지나 지도자나 모두 '형제들(8절)'의 공동체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유일한 '지도자'요 '선생'은 그리스도시며 오직 하나이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십니다.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불행히도 교회 안에서 줄곧 사치스럽게 번져 왔고 현재도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명칭들' 이를테면 '목사'보다 '박사'를 더 좋아하는 허례 허구성을 반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신앙적 차원에서 더 윗자리에 있는 척하며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겉꾸미는 태도에 대해 반박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12)"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섬김과 겸손으로 크고 높게 여김받는 자가 되라'인데 이를 제대로 이루어 낸 사람은 사도바울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성경정과 서신서 본문은 그 바울 사도와 함께한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 데살로니가 교회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나눠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살전 2:7하~9, 13)."
교인들을 어머니같이 돌본 바울 사도와 그의 말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의 수고와 노력을 기억하여 그를 사랑한 교우들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로부터 여러 곳에 아름다운 소문을 내는 좋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개미 한 마리가 소풍을 갔답니다. 큰 바위로 기어 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올라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은 백두대간 같은 산맥을 지나 드디어 산 정상에 올라 "야 신 난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때 굵직한 음성으로 "야, 무겁고 간지럽다. 그만 내려와." 코끼리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코끼리 등으로 등산을 간 개미가 엄포를 놓았습니다. "누가 내 산행을 방해하는 거야. 인마, 너 가만히 있어. 요 발로 콱 밟아 죽이기 전에…." 그 모습을 하루살이가 보고 "원, 세상에 살다 살다 보니까 별 희한한 일도 다 보겠네" 하더랍니다.
우리 주님의 시대 2,000여 년 역사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종교개혁 494년. 크고 육중한 코끼리 같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교회에서 제 분수 모르는 개미처럼 굴지 말고 더욱 신실한 믿음과 형제 사랑으로 서로 존경하며 사랑하고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과, 교회를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 성령 충만함을 간구합시다.<뉴스앤조이>